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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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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하루살이와 파리가 만나 여름날 하루를 잘 놀았다. 마음이 통한 김에 파리가 제안했다. "벗이여, 우리 내일도 이렇듯 즐겁게 놀아봅시다." 하루살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사전에 내일이란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비유할 때 자주 인용되는 우화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하루살이 인생은 속절없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의 본질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진다"는 노자(老子) 말씀이다. 어린아이일 때 여리며 보드랍다가 나이 들어 주검에 가까워질수록 딱딱해지는 사람 몸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 구절이다. 마음도 그렇다. 뻣뻣해진 몸이 잘 부러지듯 유연했던 가슴이 자기 고집으로 굳어지면 그만큼 금이 잘 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라고 '도덕경'은 전한다.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지도자와 엘리트는 '강해야 산다'는 강박관념을 국민에게 심어줬다. 일등만이 살아남는다고 쇳소리를 내질렀다. 하루살이 인생더러 '내일을 위해 오늘은 미뤄두자'고 등을 떠밀었다. 하루하루 복되고 즐거운 날이어도 아쉬운 하루살이에게 장군은 그 기쁨을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느라 부러지고 꺾이고 망가진 삶은 미래를 위한 희생으로 돌려졌다.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와 몸짓은 무시당했다. 전방 부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단단하고 강한 것에 길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정신병을 경고하는 상징적 증후로 비친다.

낮은 점수가 매겨진 한국의 병영 인권은 한국 인권의 축소판이라고 돌려 말할 수 있다. 더 단단하고 강한 사람을 길러내려는 우리 군대는 노자의 말을 빌리면 '죽음의 무리'를 키워냈다. 이 땅에 태어난 대부분 남아가 삶보다 죽음에 기울어 있는 병영 문화를 거쳐야 대한민국 사나이가 되는 건 업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55주년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분단 철책선 앞, 전쟁터 아닌 전쟁터에서 또 하나의 사변이 터졌다. 지금 전방을 지키는 젊은 그대의 삭신은 얼마나 저릴 것인가. 후방에 남아 기도하는 우리의 가슴이 이리 찢어지는데.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