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김정일 면담] 김 위원장 "부시 각하 나쁘게 생각할 근거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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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한 남측 인사들. 왼쪽부터 김보현 전 국가정보원 3차장, 임동원 전 국정원장, 김 위원장,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 최학래 한겨레신문 고문.

파격과 거침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맞이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시간30분간의 단독 면담에서 꼬여있는 북핵 제와 남북 현안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때론 정 장관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대해 덜컥 받아들이고, 때론 "검토해 보자"며 신중한 표정을 보였다. 배석한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과 연형묵 국방위 부위원장 등 실세그룹에 "당장 시행하라"고 즉석에서 지시하는 모습도 드러났다. 다음은 정 장관의 전언을 토대로 부문별로 구성한 두 사람의 면담 요지다.

▶김정일 위원장=특사 선생, 노무현 대통령께 특별한 안부 인사를 전해주세요. 노 대통령께서 한.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동영 장관=위원장께서 말씀하신 뜻을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 북핵

▶김=조선반도의 비핵화 선언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입니다. 선언은 여전히 유효한 겁니다. 조선(북한)은 핵무기를 가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울러 6자회담을 포기한 적도 없고, 거부한 적도 없죠. 다만 미국이 우리를 업수이 보기 때문에 맞서보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7월 중에라도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문제는 미국과 좀 더 협의를 해봐야겠어요. 미국의 입장이 아직 확고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6월 10일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에 가졌던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 이후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핵 문제가 해결되면 핵무기전파방지조약(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할 겁니다. 동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비롯한 사찰을 모두 수용해 철저하게 검증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와서 보라 이겁니다. 하나도 남길 이유가 없어요. 내가 지금 얘기한 걸 돌아가서 모두 공개해도 좋습니다.

▶정=북한이 체제안전보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북.미 양자대화보다 다자틀의 체제안전보장이 더 굳고 실효성이 있다는 게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김=정 특사의 다자안전보장과 관련한 언급은 일리가 있군요. 앞으로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6자회담이 재개되면 회담만 거듭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타결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중대한 제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김=(대규모 대북 지원 등 상세한 내용을 들은 뒤) 신중히 연구해 답을 주겠습니다.

◆ 북.미 관계

▶정=6월 1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대한 호칭을 미스터(Mr.)란 경칭으로 하면서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하셨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다시 한번 경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역시 최고 지도자 간의 상호 인정과 존경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웃으며) 내가 이제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부시 대통령 각하를 나쁘게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는'부시 대통령 각하는 대화하기 좋은 사람이다. 남자다. 대화하면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직 그 말을 기억합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도 같은 취지로 이야기했었죠. 클린턴 정부 때부터 나는 미국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이런 생각을 돌아가서 공개적으로 밝혀도 좋아요.

◆ 이산가족 상봉

▶정:이번 8.15는 광복 60주가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남북관계가 일년간 중단되는 동안 이산가족 행사도 열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김:중단된 상봉을 8.15를 계기로 금강산에서 이산상봉 행사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임동옥 제1부부장을 부르며) 그렇게 추진하시오.

▶정:남측 적십자사에 12만 명의 대기자가 등록돼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는 10년이 걸릴 지 20년이 걸릴 지 모릅니다. 정보화가 됐으니 화상 상봉을 통해 생사 확인된 이산가족은 화면을 통해서라도 상봉하면 한을 풀 수 있을 겁니다.

▶김:특사 선생, 매우 흥미있고 흥분되는 제안이군요. 정보화시대를 맞아 아주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8.15에 첫 화상 상봉을 성사시킬 수 있게 남북이 경쟁적으로 준비해 꼭 이뤄질 수 있도록 합시다.

◆ 남북관계

▶김:참여정부는 화해와 협력에 대한 의지가 있는 것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외정세가 나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던 거죠. 8.15 서울행사에 우리 당국 대표단을 파견할 겁니다. 비중 있는 인물로 꾸려서 보내겠습니다.

▶정:다음주에 15차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이제 회담 문화를 바꿔야 할 때가 됐습니다.

▶김:지금까지는 날씨 얘기하고 모내기가 끝났느냐는 등 회담 시작 부분에서 5분 정도 덕담이 끝나면 주먹질하고 말씨름하고 소모적인 회담을 해왔습니다. 바꿉시다.

▶정:지난해 장성급회담이 열리자 남측 여론은 '이 회담이 남북의 화해협력에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정치군사 회담이 화해협력에 도움되는 겁니다. 이 회담을 재개해야 합니다.

▶김:다음주 상급회담에서 합의하고 장성급회담 통해 정 장관이 얘기한 긴장완화로 나가야 합니다. 서해에서의 평화정착을 해야 합니다. 육지에서는 길도 내고 개성공단 만들고 하는데 바다에서 서로 총질이나 하고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정: 장성급회담과 동시에 수산회담을 열어 남북이 공동어로 개척을 해야 합니다. 긴장이 아니라 남북공동의 이익을 낚아 올리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김:장성급회담도 하고 수산회담도 합시다. 특사 선생 일행은 서울로는 어떻게 돌아갈 겁니까.

▶정:아직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직선 항로가 없습니다. 'ㄷ'자로 서해 공해로 나갔다가 가야 하니 50분은 걸립니다.

▶김:그 말도 많은 서해상으로 거쳐 갈 필요가 뭐가 있어요. 서울에서 육로 상공을 통해 평양으로 오는 방안을 신청합시다.

▶정:2000년 6.15 공동선언 때 김 위원장께서 서울을 오시기로 약속했는데 언제 오실 겁니까.

▶김:적절한 때가 되면 이뤄질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께 각별한 안부 전해 주세요. 좋은 계절이 되면 초청하겠다고 말입니다.

정리=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뉴스 분석] 속내 거침 없이 드러낸 김 위원장
북핵.6자회담에 유연함 보여
북·미관계에 한국 역할 커질 듯

17일 평양에서 이뤄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만남은 향후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현안을 둘러싼 밑그림을 새로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특유의 거침없는 언급으로 북핵 문제와 6자회담 등 난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특히 북핵 문제와 관련해 직접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유효성을 강조하고 6자회담 복귀 원칙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 비핵화 선언이 유효하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밝혔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 복귀에 대해선 "미국과 좀 더 협의해 봐야겠다"며 아직은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 위원장이 북핵 문제와 6자회담 복귀에 유연한 입장을 보인 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북한은 그동안 핵문제는 미국과의 문제라며 한국과의 논의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의 '미스터(Mr.) 김정일' 표현에 대해 '부시 대통령 각하'란 존칭으로 화답하는 등 전례 없이 우호적인 대미 인식을 드러냈다. 공개되지 않은 김 위원장의 속내를 포함한 내용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전달되면 한국의 역할에 무게가 실릴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은 남북문제와 관련해서도 굵직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지난해 7월 중단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8.15에 맞춰 재개키로 약속한 것은 대북 식량.비료 지원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앞으로 장성급 회담에서 이 문제가 본격 논의될 틀을 마련했다.

김 위원장의 정 장관 접견은 남북 당국 관계의 완전 정상화에 대한 기대치를 고조시켰다. 2002년 4월 임동원 특사를 접견한 이후 남측 당국자를 만나지 않던 김 위원장이 3년2개월 만에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양무진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이번 만남은 '남북관계 진전이 북.미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동영-김정일 면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당분간 순풍을 타게 될 게 분명하다. 당장 다음주에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향후 남북관계의 새 시간표를 짜게 된다. 남측은 쌀과 비료 추가지원 등 윤활유를 내놓을 공산이 크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 정부의 발걸음도 빨라질 수 있다.

'남북관계'와 '북핵 해결'이란 두 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면 김 위원장의 답방과 2차 남북 정상회담도 기대할 수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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