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점검 부동산 거품의 경제학] 강남 집값 지금 못잡으면 일본꼴 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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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당 1억원짜리 재건축 아파트, 평당 1000만원이 넘는 지방의 아파트 분양가, 10억원을 웃도는 골프장 회원권 등장, 최근 2년새 3~4배 오른 지방의 개발 예정지 땅값….'

심상치 않은 부동산시장의 현주소다.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부동산 시장을 바라보는 서민의 눈에는 '거품'으로밖에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더욱이 서울 강남에서 시작된 아파트 값 급등세는 분당.용인을 거쳐 과천.평촌.수원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은행 박승 총재가 "부동산 값에 거품이 있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판교발 부동산 거품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리고 이를 잡기 위해선 어떤 대책이 필요할지 집중 점검해 본다.

◆ 부동산시장 거품=집값에 거품이 끼었나를 따지는 잣대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게 매매값 대비 전셋값 비율(전세비율)이다. 이 비율이 50%를 밑돌면 거품이 끼었다고 본다.

중앙일보조인스랜드와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의 전세비율은 2001년 51.4%에서 16일 현재 31.7%로 떨어졌다. 매매가가 1억원이라면 전세가는 3200만원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다. 분당은 34.4%, 용인도 32.6%에 머물고 있다.

LG경제연구원 김성식 연구위원은 "최근 전세비율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은 가수요에 의한 머니 게임 양상이 빚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분당.용인.과천.수원으로 확산하고 있는 집값 급등은 수급 논리보다 투기 수요에 의한 거품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최근 강남과 수도권 일부의 집값 급등세만 놓고 부동산시장 전체에 거품이 끼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조슈아 펠먼 아시아태평양국 한국담당 부국장은 지난 7일 "일부 자산가격이 최근 급격히 상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주택가격에 거품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개별가격 상승은 언제나 있는 것이고 일반화된 주택 실질가격 수치를 보면 실제로는 2003년 가격 대비 6%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해밀컨설팅의 황용천 대표는 "최근 강남권 아파트 값은 인위적인 시장가격 끌어올리기에 의해 호가 중심으로 오르고 있어 초기 단계의 거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의 땅값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행정도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공주에서 시작된 땅값 오름세가 기업도시, 혁신도시, 서남해안 개발지 등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개발계획을 남발하는 한 이 같은 추세가 쉽게 꺾일 가능성도 낮다.

◆ 1980년대 후반보다 상황 나빠=80년대 후반의 경우 대세 상승국면은 87년 8월~91년 4월 사이 3년8개월간 지속됐다. 가격 상승률도 130%에 육박했다.

반면 98년 12월 시작된 이번 대세 상승국면은 2003년 말까지 100% 이상 오른 뒤 2003년 10.29 대책 이후 잠시 주춤하다 올 들어 다시 급등, 사실상 5년 이상의 장기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80년대 후반의 부동산 거품이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이뤄졌다면, 이번 부동산 값 상승은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경제 여건도 차이가 난다. 80년대에는 주택보급률이 70% 안팎에 그칠 정도로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3저(유가.환율.금리) 호황'과 내수 경기 활황으로 경제성장률도 10% 안팎에 이르렀고 물가상승률도 7~8%를 기록했다. 부동산값 상승이 경기 활황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부동산 값 오름세는 경기와 무관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장률은 2%로 곤두박질했고, 물가상승률도 3% 안팎이다. 주택보급률도 100%를 넘는다.

따라서 최근 부동산 값 오름세가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할 경우 부작용은 80년대보다 훨씬 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무엇보다 양극화를 심화시켜 서민의 상대적 박탈감과 주택구입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내수경기 위축을 심화시킬 것이란 얘기다. 집값의 거품이 급속하게 빠지면 가계 파산과 금융 부실을 불러올 수도 있다. 판교발 부동산 거품을 초기에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동산 거품은 도쿄만의 일" 일본, 방치하다가 9년 불황

일본의 부동산 거품은 정부의 안이한 상황 판단에 따른 '온탕-냉탕 정책'과 당시 경제 상황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거품의 발단은 1983년 도쿄 중심가의 사무실 부족이었다. 처음엔 중심가 빌딩 값만 올랐지만 투기수요가 일자 오름세는 변두리로 삽시간에 옮겨 붙었고, 곧 지방의 땅값으로까지 번졌다. 초기 일본 정부는 부동산 거품이 도쿄 중심가에 국한된 현상으로 치부하며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85년 미.일 정부가 엔화 값을 올리기로 한 '플라자 합의' 이후 경기 침체를 걱정한 일본 정부의 저금리 정책도 부동산 거품에 일조했다. 일본 정부는 85~87년 금리를 연 5%대에서 2.5%로 낮췄다. 여기다 대기업은 은행 대출을 줄이는 대신 주식.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대출할 곳을 잃은 은행은 경쟁적으로 부동산 담보대출에 나섰다.

도쿄 중심가의 부동산 값 오름세에 자극된 투기수요가 시중의 풍부한 부동자금과 저금리라는 기름을 만나자 거품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는 얘기다. 낮은 부동산 보유세와 상속세도 이를 부추겼다.

83년부터 9년을 끈 부동산 거품이 정점에 도달할 무렵 일본 정부는 냉탕 정책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89~90년 사이 2.5%였던 공정금리가 6%로 올랐다. 빚으로 빌딩을 사모았던 개인.회사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하는 규모를 일정 수준으로 묶는 이른바 '부동산 대출총량제'는 부동산 시장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비록 최근 아파트 값 거품이 강남과 분당.용인 등 수도권 일부에만 국한된 현상이지만 투기수요가 붙으면 삽시간에 다른 지역으로 확산할 수 있다. 저금리 정책의 지속과 은행의 경쟁적인 부동산 담보대출 경쟁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부동산 거품을 잡기 위해 갑작스러운 금융 긴축에 나서거나 대출 축소와 같은 직접 규제를 가하는 것도 위험하다. 자칫 부동산 거품이 일시에 꺼지면서 경기 침체를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특별취재팀
정경민.허귀식.김종윤.박원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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