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5)제76화 아맥인맥(5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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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부산 피난시절>
종군을 마치고 가족들이 있는 대전에 올라와서 집안을 정리,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는 방직공장을 하는 외종매(황우호)가 살고 있어서 방직공장 사택에 식구들을 맡겨 놓고 나만 서울대 피난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장발 미술대학장은 미국 미네소타대 교환교수로 가 있어서 미술대학은 이재훈씨가 학장서리를 맡고 있었다.
이씨는 일본 상지대에서 철학을 전공, 휘문고보에서 장발씨와 함께 교편생활을 하다가 서울대로 옮겨 미학을 가르치던 분이다.
그때 미술대학은 송도해수욕장 옆 큰길가에 있는 일본 요릿집 방 몇 개를 얻어 쓰고 있었다.
8조짜리 다따미방 서너개를 교수실·강의실로 나누어 썼다.
교수실은 8조방을 교무실과 함께 통용했다.
강의실은 방 둘을 툭 터 교수와 학생들이 다따미 위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교수들은 여기서 합숙했다. 나와 김종영 송병돈 공형식 교수가 여기서 자취하고 있었다. 이순석 교수도 있었는데 그는 가족이 내려와 있어서 합숙하지 않고 통근했다.
교무과의 김창준 한영삼씨도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학장서리로 있던 이재동씨, 송병돈 교수, 공형식씨는 모두 술을 좋아해서 나와 어울려 피난살이의 설음도 달랠 겸 바닷가 대폿집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술이 거나해 가지고 들어오는데 학교 앞에서 웬 아가씨들이 우리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학교 앞에서 매춘행위를 하는 아가씨들이었다.
우리들은 취중에도 학교 주위환경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입을 모으고 학교를 옮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 송도 뒷산에 터를 확보, 판잣집을 지어 미술대학 간판을 걸었다.
비록 가교사이긴 해도 전망이 좋아 학교 경치는 그만이었다. 여기서 학생들은 남해의 푸른 물을 보며 스케치도 하고 청운의 뜻을 키웠다.
우리들은 부산 피난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부산에 있던 대한도자기회사(사장 지영진)에서 외국에 수출하는 도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영진 사장의 배려로 작업장 겸 숙소를 배정 받아 3, 4명씩 그룹을 지어 일했다. 이때 대한도자기회사에서 나와 함께 일한 학생들은 김세중 서세옥 문학진 장운양 박세원 권령우 박순일(여) 등이었다.
나중에 남정(박노수)도 고향(충남 연기)에서 부산에 내려와 복교하고 도자기 그림을 그렸다.
도자기 그림은 수출품이어서 주로 한국 풍속도를 많이 그렸다. 김세중 서세옥군이 한방을 쓰고 나는 따로 작업장을 얻어 박세원 권령우군과 함께 있었다. 이때 산정(서세옥)은 군복만 입고 다녔다.
박세원군은 돈독한 가롤릭 신자여서 봉사정신이 강할 뿐 아니라 성격도 차분해 취사당번을 도맡아 하다시피했다. 메모지에 품목을 깨알처럼 적어가지고 나가 영도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왔다.
이때 학교에서 현미 7, 8두씩 배급을 주어 식량걱정은 없었다.
침구가 없어 광목과 솜을 사다가 박순일양에게 부탁해서 이불을 꾸몄다.
박양은 바느질 솜씨는 괜찮지만 솜둘줄을 몰라 애를 먹었다.
이때 권령우군과 박순일양이 열애중이었는데 박양의 아버지(박의균)가 반대해 내가 중간에 들어 일을 만들었다.
마침 박양의 아버님이 부산에 내려와서 내가 만나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승낙을 받아냈다.
『권군은 착실할 뿐 아니라 생각이 깊어 다른 청년 같지 않다』며 『박 선생 따님 데려다가 고생시키지 않을테니 한번 맡겨보라』고 했더니, 박씨도 『딸에게서 권군의 사람됨을 들어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학생들이 대한도자기회사 그림을 그릴 때 이곳에는 우리 말고도 이당(김은호)·소정(변관식)·혜촌(김학수) 등이 와 있었다.
나는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대구에 가족들을 만나러 1주일에 한번씩 부산∼대구를 내왕했다. 애들이 밤과자를 좋아해서 집에 갈 때는 으례 부산역에서 밤과자 두 봉지를 사 가방에 넣고 대구에 갔다.
부산∼대구 내왕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미술대학이 영도 일본요릿집에서 송도 판잣집 가교사로 옮겨가자 나도 학교일에만 전담하기 위하여 도자기 그림도 그만두고 부산에 정착했다.
식구들은 영도 가까운 영선동에 데려다 놓았다가 다시 송도로 이사, 학교 아래 산허리에 걸린 원두막 같은 집에서 전세 살았다. 아래층은 우리가, 2층에는 영국사람이 한국여성과 함께 동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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