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0)<제76화>화맥인맥(49)「1·4 후퇴」|월전 장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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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1년1월3일 오후에 나는 7살 짜리 맏딸의 손을 잡고 안사람은 갓 돌이 지난 둘째딸을 업고 한강을 건너 남하대열에 끼었다.
그때 한강은 인도교가 끊겨 큰 드럼통을 엮어 강 위에 띄우고 그 위에 판자 쪽을 놓아 가교를 만들어 놓았었다.
1·4후퇴로 남하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다리를 건너야했다.
우리 식구들은 일단 한강을 건너 영등포에 있는 철농(이기우)의 집을 찾아갔다. 철농은 공군에서 제대, 제일방직 개장으로 관사에 들어있었다.
피난처도 막연할 뿐 아니라 무엇을 타고 가야할지 몰라 우선 철농에게 신세를 진 것이다.
전쟁 중이었지만 철농은 우리식구들을 환대, 하룻밤을 편히 쥐었다.
아침 일찍 영등포역에 나갔다. 기차를 타려고 서성대는 피난민으로 역 광장은 발 들여놓을 틈조차 없었다.
피난민들은 하나같이 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당장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다.
문득 이대로 내려가다간 얼어죽을 것만 같아 중요한 것도 챙길 겸 식구들을 여인숙에 있게 하고 단신으로 다시 한강을 건너왔다.
손수레를 끄는 짐꾼을 데리고 집에 가서 이불·옷·화구 등을 싸고 재봉틀을 싣고 나왔다. 재봉틀은 여차하면 삯바느질이라도 해 먹고 살 생각에서였다.
노량진으로 나갔더니 배다리로는 사람만 건너게 해 짐수레는 갈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배에 짐을 싣고 건 널 양으로 마포나루에 갔다.
나루에는 완장을 찬 청년들이 지켜 서서 증명검사를 했다. 증명이 있어도 웬만한 사람은 건너지 못하게 했다.
나는 증명이 있는지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문득 공군 종군화가증명 생각이 났다.
빨간 줄이 두 줄 쳐있는 종군화가 증명을 내보였더니 맨 먼저 배를 태워주었다.
영등포역 앞에 가 여인숙에 있던 식구들과 합세했다.
우선 요기부터 하고 역에 가서 차편이 없나 알아봤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인숙에 돌아와 몸을 녹이고 곰곰 생각해 봤다. 그날 밤은 여인숙에서 묵고 다음날 행동을 개시할 생각으로 계획을 짰다. 여인숙에서 새벽밥을 시켜 먹고 지게꾼에게 짐을 지워 영등포역으로 나갔다.
개찰이고, 표 검사고 역의 기능이 마비되어 무조건 기차를 대어놓은 곳으로 짐꾼을 앞세우고 갔다.
저 만치에 빨강·파랑 색 신호기를 말아 쥔 역원이 서 있었다. 다짜고짜로 그 사람 옆에 가서『이 기차 떠나는 거지요』하고 떠봤다. 간다, 안 간다 말이 없이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3천원을 똘똘 말아서 그 사람 손에 쥐어주고 부녀자와 어린애들을 내세워 사정 좀 봐달라고 매달렸다.
그는 무뚝뚝하게 서 있다가 어디론지 가면서『다른데 가지 말고 꼭 여기 서 계시오』하고 사라졌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해질 무렵에야 그 역원이 나타나더니『날 따라 오시오』하고 앞서서 빨리 걸어갔다.
한참을 따라갔더니 거기도 기차가 있었다. 그는 창고 차 문을 열어 주고는 애들은 부축해 기차에 태워놨다. 끙끙거리면서 짐을 받아 싣고는 후유 한숨을 쉬었다.
이차에는 상자가 사람 키 높이로 꽉 차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포탄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도 없이 그 위에 앉아 이제 살았구나 하고 애들 손을 잡았다. 이기찻간에는 우리식구 말고도 군복차림의 남성, 경찰간부 가족 등 20여명이 타고 있었다.
기차는 한밤중에 떠났다. 어찌나 길게 연결했는지 힘이 없어 터덕거리는 것 같았다. 한참을 가는데 비가 쏟아졌다. 터널을 통과하다가 지붕에 매달려가던 사람이 떨어졌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도 들렸다.
기차는 이틀 낮, 이틀 밤을 달려 대전 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내렸다. 나는 대전에 살고 있는 처남 집에 식구들을 맡겨 놓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 집에서 나는 극적으로 전투경찰에 들어가 서울에서 훈련을 받던 사촌동생(장우념)을 만났다. 그에게 훈련 중 집도 지킬 겸 남기고 간 양식으로 밥을 지어먹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이튿날 아침 서울대 법대 앞 이화동네 거리에서 헤어졌다. 그는 훈련을 마치고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출동, 구비에서 건사하고 말았으니 이게 그와의 마지막 작별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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