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27. 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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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

1950년 9월 중순이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제2군단사령부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이 첫 반격을 시도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도 잘랐다. 보급로가 막힌 북한군은 낙동강 전투에서 패했다.

나는 중부 전선의 진격 부대를 따라 충주.원주를 거쳐 9월 말에 서울 청량리역까지 갔다. 인천상륙부대가 마포를 뚫고 들어와 중앙청 앞뜰에 태극기를 매단 뒤였다. 제2군단사령부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혜화초등학교를 임시 사령부로 정했다. 당시 군예대의 임무는 다양했다. 위문 공연에다 간첩 색출, 최전방에선 북한군을 향해 귀순 방송까지 했다.

진을 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모처럼 외출 허가를 받았다. 미제 군용 식기에 숯을 넣고 돌을 데웠다. 그리고 아끼던 새 군복을 다려 입었다. 시내로 나갔다. 혜화동 주변은 괜찮았다. 그러나 함포 사격이 집중된 오장동은 쑥대밭이 돼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검게 그을린 벽돌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명동의 시공관 앞을 지날 때였다. 멀리서 오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얼어붙은 듯이 걸음을 멈추었다. 상대도 움찔하는 표정이었다. 바로 옥이였다. "옥이!" 나는 달려가 와락 그를 껴안았다. 1년 전 헌병 상사와 결혼하게 됐다던 옥이.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서 애매한 감정으로 헤어졌던 우리였다. "삼룡씨, 살아 있었군요." 그랬다. 그때는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최고의 안부였다.

우리는 빈 터로 갔다. 폭격으로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폐허 더미에 걸터앉았다. 그는 무척 초췌해 보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옥이는 울먹이며 입을 뗐다. "남편은 전사했어요. 할머니도 폭격으로 돌아가셨고요." 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이제 혈혈단신이었다. 그리고 결혼식 패물과 옷가지를 팔아 지난 1년을 버텼다고 했다.

"살던 집은 폭격으로 무너졌어요. 잘 곳은 있지만 쌀독도 비고, 장작도 떨어졌어요." 악극단 시절, 그는 객석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히로인이었다. 그런 옥이가 너무도 참담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뒤적뒤적 주머니를 털었다. 그리고 옥이에게 돈을 건넸다. 그는 기겁했다. "아니에요. 이건 싫어요." 그는 돈을 뿌리쳤다. 동정은 싫다는 표정이었다. 악극단 주연 여배우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그래도 모른 척 일어설 수는 없었다. 거의 강제로 돈을 손에다 쥐어 줬다. 마다하던 옥이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고마워요, 삼룡씨"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리고 꼬깃꼬깃 돈을 접어 저고리 안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그 뒤 옥이는 6사단 군예대로 들어왔다. 소속 부대는 나와 달랐다. 그래도 우리는 오누이처럼 정을 쌓아갔다. 어쩌다 미군 부대에서 화장품을 구하면 나는 그에게 보냈고, 옥이는 종종 내게 밑반찬을 부쳤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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