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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제자·원유 김기승)-혁명전야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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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16 전야 정군의 소리가 정치개혁이라는 쪽으로 옮겨져 가던 시기는 정군 운동이 표면상으로는 가라앉았던 때다. 군 일부에서 정치개혁을 거론한 것은 정군 운동이 움트던 4·19직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군이라는 말로 더러는 거사의 결의 표명으로 줄곧 이어져왔다.
그러나 60년 후반까지도 중견장교들이「우리가 정치를 맡아야한다」「엎어야 한다」는 말을 해도 그것은 감정의 과격한 표현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 무렵 중견장교에 있어 정군은 의욕이자 출구였다.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 것이「16명 사건」이다.
「16명 사건」의 관련자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자 정군의 소리는 표면상 얼마간 가라앉는 듯 했다. 육사8기 중심의 충무장 그룹은 16명 사건이 혁명으로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기실 이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정군 운동에서 뜻이 모아진 다른 여러 갈래의 모임도 조용히 관망한다는 점에선 충무장 그룹과 비슷했다. 그것이 정군의 내연이고 거사로의 전이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16명 사건 관련자 전원을 군재에 회부한 것은 뜻밖의 사태였고 그러기에 그 처리는 관심거리였다. 그런데 정작 재판결과는 김동복 대령(7기)을 제외한 전원이 무죄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충무장 결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거사준비가 활기를 띤다.

<항명 아닌 대화 나눠>
「16명 사건」의 무죄언도가 정군 운동 그룹을 고무한 것일까. 그것은 어쨌든, 무죄가 된 것은 어떤 사정변경이 아니라 자신의 증언 때문이라는 것이 최영희씨의 주장이다. 그의 증언.
『군사혁명사의 기록은<한국군 내부의 정군 운동을 반대한다>는 소위「파머 성명」에 내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16명의 장교들이 나를 찾아와「파머 성명」의 경위를 해명하고 퇴진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달라요. 미국무성 군원국장「파머」대장이 출국 때 김포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한국군의 점진적인 개혁은 바람직하지만 과격한 숙군은 반대한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 이예요.
그러나 이 반대성명에 내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니야. 나는 다만 연합참모부 총장으로서「파머」대장을 초청했고 초청자로서 그를 배웅했을 뿐이야. 그해 10월 연 참 총장직 사표를 내고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파머」를 만나 경위를 물었더니<내가 한국군 내부의 사정을 어떻게 소상히 알겠느냐 정군 운동이 문제 거리라고 한「매그루더」주한유엔군사령관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경위가 어쨌든「파머성명」의 불똥이 떨어져 육본의 영관급 장교들이 나를 찾아왔더군요.
16명 사건이라 해서 16명 모두가 온 것으로 전해져 있지만 그렇지 않고 5∼6명 이였어요. 누군지는 기억에 없고 이석제 중령(8기·최고의원·감사원장)한사람은 생각이 나는군요. 그들은 과격한 말로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퇴진요구는 있을 수도 없었어요. 다만 군 내부의 문제를 놓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내가 사표를 낸 20여일 후에 이게 하극상사건으로 문제가 되더군요. 재판 때 당시의 육본검찰과장 장영순 대령(7∼10대 의원)이 찾아와 증인을 서라는 거야. 그래 법정에서「선배와 후배가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을 뿐이다. 하극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그들을 두둔했지요. 나의 이런 증언이 무죄를 만든 것입니다.』이 증언은 16명 사건의 당사자 증언과는 어긋나는 대목도 있지만 최 장군이 사건직후 이들의 군재 회부를 반대했다는 데는 증언이 일치한다. 그런데도 결국 재판에 회부된 것은 당시의 최경록 참모총장도 그랬고 특히 김형일 참모차장(신민당소속의원 당 사무총장·작고)이 하극상사건은 묵과할 수 없다고 해 취해진 조치였다.
정군에 대해서도 최영희씨는 군의 상층부의 상당수가 긍정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4·19이후 군도 변화가 필요했어요.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퇴진건의서한」을 보낸 직후 현지로 내려간 것은 나였어요.
폭동가능성이 있으면 군수기지사령부를 접수하라는 송 참모총장의 비밀명령을 받고 있었지요. 나는 그때 육본직할 교육총본부 총장이었는데 전에 군수기지사령관을 두 차례나 지내 부대사정을 잘 알았어요. 부산으로 가기 전 육본 참모부장 김계원 소장을 만났더니<송 총장이 사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박 장군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말하더군. 난 부산에 내려가 박 장군과 함께 밤새껏 술잔을 나누며 시국얘기만 하고 올라왔지요.「부대 출동은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지요.
또 나도 송 총장이 퇴진해야 한다는데 동감이었고…. 그 얼마 뒤 송 총장이 군복을 벗자 나, 장도영2군사령관, 김동오 연참 총장·최경록 참모차장, 유재흥 1군사령관 등이 사표를 냈지요. 과정의 이종찬 국방장관이<장성들이 모두 사표를 내면 군은 수습할 수 없게 된다>면서 사표를 반려했어요.
과정하의 정군문제는 결국 송 총장 등의 후퇴 선에서 끝나고 그해 8월 민주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군의 관심은 민주당의 정책인 정군(5만 감군)으로 옮아갔다는 것이 최씨의 설명이다.

<이주일 소장 큰 도움>
아무튼 그해 12월「16명 사건」이 종결되고 61년 봄이 되면서 5·16의 구상은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61년 3월초 충무장 그룹은 종로4가에 있던 한 무허가 음식점에서 비밀회합을 갖는다. 여기서 결정원 조직지침은 포섭대상자는 핵심멤버 11명의 연석회의에서 검토를 거친 뒤 접촉하며 연락은 1대1에 그치는 엄격한「종적연락」이었다.
3월10일 충무장 그룹의 대표들이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그간의 상황을 보고한다. 4월19일을 D데이로 정한 것이 이때다. 그 무렵은 박정희 소장도 서울을 드나들며 마지막 조직활동에 나서있던 때다.
『박 소장은 거의 주4일은 서울에서 지내다시피 했어요. 2군 사령부참모장 이주일 소장이 동지여서 큰 도움이 됐지요. 이 장군은 국방부나 육본에서 박 부사령관을 찾는 전화가 오면 그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처했어요. 간밤의 술이 과했다고도 하고 퇴역 후에 할 일을 준비하는지 바쁘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됐다고들 합디다. 』 (Y씨 증언) .
당시의 2군사령관 최경록 중장이 미 국방성 초청으로 4월초부터 5월13일까지 미국에 머물렀어요. 사령관이 없으니까 부사령관이 참모장에게 일을 맡기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겠지요. (최 사령관 보좌관이던 주종하씨 (50)의 증언) .
혁명주체로 5·16후 최고위원·감사원장 등을 지낸 이주일씨의 증언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원래 부사령관이란 한직 아닙니까. 서울에 자주 갔었지요. 그렇지만 서울에 주4일이나 가있기야 했겠어요.』라는 것.
박 소장의 조직활동도 바로 옆자리의 친구가 동지인지도 모르는 아주 철저한 점 조직이었다는 것이 당시의 ×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 (5기) 의 회고.

<야전군도 대거 참여>
이것은 제×공수단장으로 5·16의 주력부대를 이끈 박치옥씨(5기)의 증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5·16 당일 거사계획이 누설 돼 장도영 총장이 급파한 특전감 장호진 준장이 우리 공수단에 나와 감시하고 있을 때입니다. 잠시 후 장경순 준장이 들어왔습니다. 밤중에 어쩐 일이냐고 했더니<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는 것입니다. 밤중에 장경순 준장이 이곳을 지나갈 리는 없고, 틀림없이 감독하러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래서 슬그머니 나가 대대장들을 소집해 모두 잠든 것처럼 불을 끄고 출동대비 태세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경순 준장이 동지더군요.』
조직은 3등급. A급은 핵심멤버, B급은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을 포섭하는 적극적 동조자. C급은 어느 면 소극적으로 보이는 동조자였다. 조직이C클래스까지 뻗친 4월초쯤엔 4·19거사를 위한 출동태세가 그런 대로 짜여졌다.
출동부대의 주력인 공수단에는 11명의 중대장급(대위)으로 된 특수 팀이 짜졌고 △사단은 유기홍·백대숙·채희덕·박성주 소령 및 위관장교, ○사단은 참모장 이갑영 대령·부사단장 문정식 대령, ××연대장 박상훈 대령·헌병부장 강오현 소령 등이 가세했다.
제×군단포병은 핵심멤버인 신충창중령 (8기· 6· 7대의원) 이 이 포병단에 부임하여 박 소장과 연결되어 있던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군단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후일 문공장관)을 돕게 되었다. 육본대학은 정문정 중령(8기)에 의해 조직된 윤필용(8기·현재 도로공사 사장)김달훈 중령 등이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방조직은 2군 참모장 이주일 소장이 주도했다. 제○군사령부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 통신참모 박승규 대령 및 행동부대로 제○○○공병대장 장동운 중령(전 치안국장), 제○관구 공병시설대장 서상린 중령 (6∼10대 의원), 제×공병시설대장 임광섭 중령, 제○○○공병대장 김진국 중령, 제××통신대장 성수환 중령 등이 그들.
역시 후방의 제○사단장 최주종 소장, 제×사단장 김진위 준장, 제○훈련소 한관흥 대령, 부산의××사령부참모장 김용순 준장 등은 박 소장과의 직결 케이스.
야전군사령부의 제○사단장 채명신 준장, 제△사단장 박춘식 준장, 제×군단장 박임항 중장 등의 참여도 박 소장 활동의 두드려진 성과.
충무장 그룹도 여기에 힘을 보탰는데 사령부의 조창대 심이섭 엄병길 김홍래 박승 등 10여명의 중견장교, 사단별로는 ○사단 작전참모 조주태 중령, 제△부연대장 김병서 중령, 제×연대장 한병갑 대령, 제△사단 작전참모 한윤찬 중령, 박임항 중장 직속의 작전참모 이광학 중령 등.
D데이로 정한 4·19 1주년 전야의 포진은 이런 형세로 D데이를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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