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폭등 … 저금리 딜레마] 2억 빌려 월 100만원 이자 내도 집 사면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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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은 9일 정례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오랜 시간을 끌며 콜금리 방향을 논의했다. 평소엔 한 시간 안팎이면 끝나던 정례회의가 오전 9시부터 무려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콜금리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콜금리를 잇따라 내렸으나 투자와 소비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시중에 자금이 넘쳐 나 부동산시장만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아 금통위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박승 한은 총재는 이날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금통위도 부동산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 한은이 때가 되면 대출 제한 조치에 나설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저금리의 기대효과만 줄곧 강조해 온 한은이 저금리의 부작용을 인정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 과도한 유동성=한은이 저금리를 부동산시장 과열의 배경으로 인정한 것은 저금리 정책 이후 가계 대출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말 86조원에 불과하던 주택담보대출은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2년 만에 두 배로 불어났다. 이때부터 정부는 주택담보대출(LTV) 비율 규제에 나섰지만 주택담보대출은 계속 가파르게 늘었다.

'2003년 10.29 부동산대책' 이후 주택담보대출 비율을 지역에 따라 40~60%로 규제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시중 금리가 연 4%대로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소비침체의 골이 깊어지자 지난해 8월과 11월 한은이 콜금리를 연 0.25%포인트씩 추가로 내리자 자금의 단기부동화는 더욱 심화됐다. 5월 말 현재 만기 6개월 미만의 부동자금 규모는 400조원가량으로 추정된다.

특히 지난해부터 물가상승률을 뺀 세후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시대로 접어들었고, 은행 적금은 원금을 까먹는 비합리적 경제행위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산층은 부동산으로 몰려갔다.

◆ 머니게임 초래=회사원 김모(42)씨는 올 초 강남 재건축 아파트 급매물을 5억2000만원에 구입하면서 2억원을 은행에서 빌렸다. 금리가 5% 수준에 불과해 월 이자는 100만원 수준이다. 맞벌이를 하는 김씨에게는 그리 큰 부담이 아닌 데다 집값은 재건축 호재를 타고 벌써 2억원가량 올랐다.

시중은행의 관계자는 "최근 30대 초반의 직장인도 서울 강남과 목동, 분당, 판교 등 인기 지역의 부동산을 구입하기 위해 2억~3억원가량의 대출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빚 내서 사두면 오른다'는 신화가 최근 4~5년간 현실로 나타나면서 돈을 빌려 투자에 나선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저금리에 힘입어 연봉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 투자에 나섰다. 현재 주택담보대출금리는 연 5~6%로 1억원을 빌려도 월 이자가 50만원에 불과하다. 최근 은행에서 2억5000만원을 빌려 강남에 7억원짜리 아파트를 산 회사원 이모씨는 "저축하는 셈 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 수입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이자 부담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저금리 논쟁 가열=넘치는 돈이 정부와 한은의 기대와 달리 투자와 소비 확대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저금리에 따른 부작용 논란은 한층 거세지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2005년 정례협의에서 "물가와 집값이 안정돼 있으므로 금리를 더 내려 소비를 진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콜금리는 경기회복 정도, 국내외 금리차, 소비자물가, 기업의 금융부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경기가 회복된 뒤 부동산 과열이 지속된다면 그때 가서 올려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돈이 돌지 않으면서 부작용은 날로 커지고 있다. 부동산시장의 과열이 정부의 인기지역에 대한 공급 억제정책과 징벌적 규제 때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저금리에 따른 유동성 과잉은 부동산 과열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연구원은 "부동산 광풍이 불 때마다 소비가 위축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매매가 위축되면 관련 서비스업, 중개업, 인테리어, 가전, 가구 등 내수가 줄고 경기를 살리려고 금리를 내리면 경기엔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다시 부동산으로 돈이 몰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효과가 의문시되는 저금리 시대를 끝내고 콜금리를 한두 차례 올릴 때가 됐다"고 전 연구원은 말했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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