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회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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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2공화국의 마지막 밤이 된 61년5월15일.
대롱령관저 청와대는 다음날 서울에 도착하는 페루의「마누엘·프라도」대통령의 영접준비로 부산했다. 윤보선대통령이 일을 마치고 침실로 자리를 옮긴 것이 11시30분.
집권자 장면총리의 임시 숙소 반도호텔 809호실. 저녁 늦게 시작된 심야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10시30분에야 회의를 마치고 방문객 면담, 미결서류 점검등 일처리룰 끝낸 총리가 잠자리에 든것은 다음날 0시40분. 제2공화국 수뇌진의 평범한 하루였다.
그러나 이 시간에 서울근교 군부대는 숨가쁜 사태급변의 소용돌이에 휩쑬려 들고 있었다.
밤11시30분. 5·16의 주역 박정희소장은 미행하는 두대의 육군방첩대 지프를 따돌리고 지휘본부로 정해진 ×관구 사령부로 달리고 있었다.
거사계획이 누설되어 저지선이 쳐지고 있다는 긴급정보에 아랑곳 없이 화살을 시위에서 떠나보내는 결단의 질주였다.
그는 달리는 차속에서 사태를 그려봤다. 출발 1시간전 ×관구사령부참모장 김재춘대령의긴급전화.『○사단 박상동대령의 배반으로 ×관구사령부에 비상이 걸리고 다른부대의 출동도 어렵게 됐읍니다.』
이 소식에 접했을때 지휘부에 있던 부하들중에선 일단 D데이를 늦추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집(신당동박소장자택)에선 통신망도 여의치않은데 이미 행동을 개시한 다른 부대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누설됐으니 더욱 강행이외엔 길이 없잖은가.』연기론을 이렇게 일축하고 결행의 길에 올랐지만 전도는 험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거사률 막아선 정보누절로 얘기를 돌리자. 5·16출동의 선두부대는 ○사만. 그 사단의 행동부대장인 이갑영참모장(대령)과 박상동부사단장(대령)은 혁명핵심조직과 ○사단과의 연락을 맡고있던 이백일중령의 행동이 미덥지 못했다. 핵심조직과 연결시켜주지도 않고 다른 출동예정부대등 계획의 윤곽도 알려주지않아 소외감을 느낀데다 막상 15일 오전 출동시간만 통고받고보니 불안해졌다. 낮12시 이대령은 박대령을 찾아갔다. 『밤10시 집결, 새벽2시 출동이라는데 알고 있어….』 박대령은 모르고 있었다. 하오3시 박대령이 이대령을 찾아왔다. 『나 좀전에 이중령을 불러내 오늘 출동하는게 사실이야. 나에게 말도없이…. 난 못하겠다고 호통을 치고왔어.』이래서 두대령은 5·16대열에서 이탈하기로 결정을 했다.

<사단장도 출동몰라>
오래 침묵하고 있던 당시의 이상국 ○사단장의 증언으로 그 이후룰 알아보자.

<내가 시내로 나가려고 일어서려 할때였으니까 7시20분쯤이지요. 이대령과 박대령이 돌어와요. 그래 『중대한문제가 아니면 시내에 나가려던 참이니 내일 얘기하지』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박대령은 불쑥 『부대가 오늘밤 출동하는 사실을 아십니까』라고 물어요. 『사단장도 모르는 부대출동이 어딨어.』나는 박대령의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은 말에 화가났지요. 내가 화률 내니까 이대령이『밖에나가 식사나 하면서 얘기하시지요.』그러면서 나가자는 재촉을 해요.
나도 시내 약속에에 대자면 나가야할 시간이어서 함께 나왔지요. 내가 운전을 하고 먼저 박대령을 옆에 태웠지요. 들어보니 거사를 위한 출동얘기 아닙니까. 『우리 부대률 비롯해 해병대와 공수단도 출동하게 되어있으니 신중히 결심하셔야 합니다.』이게 박대령의 보고 결론이었어요. 나는 녹반리 삼거리에 차률 세워 다른 지프로 뒤따르던 이대령을 박대령과 자리룰 바꾸게 했지요. 이대령도 같은 보고예요. 그러면서『오늘밤 행동개시직전 사단장과 ×관구사령관숙소를 포위하고 감금하기로 되어 있읍니다』라고 보고를 맺었어요. 그래 난 그랬지요. 『도대체 그 적은 병력을 갖고 뭘 하느냐. 딴소리 말고 내 지시에 따르라.』그러곤 개운찮은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갔지요.>
이날 이사단장의 약속장소는 중구다동에 있던 한식집 삼희정. 육본정보참모부 김판규대령과의 저녁식사였다. 8시30분 삼희정에 도착한 이사단장은 먼저 와있던 김대령에게 방금 듣게된 두대령의 중대보고를 얘기했다. 『나도 그런 정보를 들었어. 일단 방첩대에 알아보는게 좋겠어.』그제서야 사태를 실감한 이사단장은 김대령과 함께 조선호텔 맞은편에 있던 서울지구 방첩대로 달려갔다.
급보를 듣고 뛰어온 방첩대장 이철희준장은 이사단장의 설명을 듣고 장도영참모총장의 소재률 수배, 황급히 달려 나갔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한 이상국사단장은 박상동대령에게 즉시 귀대해 출동부대룰 해산하라고 지시하고 ×관구사령부에 사건의 전말을 전화로 알렸다.
한식집 은성에서 육본장성들과 식사중이던 장도영참모총장이 이방첩대장의 직접보고를 듣고 방첩대 본부에 도착한 것이 밤10시40분. 그 시간은 공교롭게도 반도호텔에서의 심야 국무회의를 끝낸 각료들의 승용차도 조선호텔 옆을 지나가고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방첩대장 이준장과 함께 장총장이 들이 닥치면서 방첩부대는 혁명군 진압지휘부로 돌변했다. 장총장은 육본·
방첩대 (CIC)·헌병대에 연락, 참모진을 비상소집하면서 서울근교 부태에 긴급지시룰 하달하기 시작했다.
맨먼저 손쓴 곳은 ×관구사령부. 서울근교 주둔 사단을 관할하는 ×관구사령부는 혁명군에도 선두주력부대로 예정되어 었었다.
×관구사령부는 비상이 걸렸다.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지고 영의로 나갔던 사령부 장교들이 황급히 귀대했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지원부대로서 장총장이 보내는 장성, 헌병차감, 헌병중대, ClD수사관이 차례로 ×관구사령부로 들이 닥쳤다. 혁명군이 포진한 2개의 사단과 공수단에도 비슷한 조치가 뒤따랐다. 그러나 사태는 반전하지 않았다.
정보누설을 극복한 ×관구사령부의 얘기만 옮겨보자. 이곳 부대 지휘 책임은 ×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대령과 작전참모 박원빈중령.
이하는 김재춘씨의 회고다.
그날 저녁나절 출동점검이 모두 끝났다. 달리 할일은 없고 초조속에서 심야의 출동시간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견딜수 없었다. 시내로 나가 몇몇 친지를 찾아본뒤 거리를 배회했다. 10시반쯤 얼핏 불길한 예감이 스쳐 부대에 남은 박원빈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단에서 정보가 누설돼 이백일중령에겐 체포령이 내렸다. 이중령은 정보누설을 사전에 알게되어 150고지로 피신해 있으면서 밤9시반쯤 긴급사태를 알려왔다』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2안대로 결항하라>
나는 박정희소장에게 이 긴급사태를 보고 했더니『제2안대로 결행한다. 내가 갈때까지 김대령이 사령부룰 장악하시오』했다. 나는 전화를 끊은 즉시 정신없이 달렸다. 내가 도착한 것은 비상을 건 직후로 사령부 외곽의 삼엄한 경비가 막 끝난 때였다. 사령관은 나를 찾고 있었다. 행운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서종철사령관에게 귀대를 알리자 나의 혁명군참여룰 알지못하고 있던 사령관은 내게 부대장악과 관련 장교 전원의 체포감금을 지시했다. 부대진압책임이 내게 맡겨진 것이다.>
그날밤. ×관구사령부는 혁명군과 진압임무의 고급장교가 뒤섞여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대세는 출동으로 기울어갔다. 그날을 회상하는 관계자의 한결같은 증언은 군의 분위기가 혁명의 당위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사전 누설에도 불구하고 부대출동이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해도 ×관구사령부와 예하부대의 출동은 장총장의 제지로 얼마간 지연되었다. 이래서 작전계획과는 달리 선두에 선것이 해병여단. 그 비화룰 여단장 김윤근준장은 이렇게 말한다.

<2월에 여단장 발령을받고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일본육사선배인 박소장에게 인사차 들렀더니 거사 의지를 밝히더군요. 『김장군만 믿소』그러면서 동참해 줄것을 권유합디다. 그런데 부임직후 대대장 오정량중령, 부연대장조남철중령,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등이 찾아와 『해치우자』고 울분을 토하기에 『무슨 망발이냐』고 꾸짖어 보냈지요. 그런뒤 그들 중견장교에대한 뒷조사률 해봤더니 모두들 믿을만한 장교들입디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 해병대가 단독으로 할것이 아니라 육군의 박소장에 합세하자고 설득했지요.
이윽고 5월16일새벽 우리는 그날 예정대로 출동했지요. 염창교에서 우리와 마주친 박소장은 눈물이 글썽해 반기면서 『○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어 공수단이 발이묶여 늦어졌으니 해병대가 앞장서야겠소』합디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충격이었습니다. 육군의 작전계획을 사전에 면밀히 검토해야 했는데 너무 믿었구나 하는 후회도 났지만 엎질러진 물이라 밀고 들어갑시다고 했죠.>
그러나 해병대가 한강을 넘었을 때 공수단이 뒤따라왔고 육본엔 역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던 ×군단포병대가 먼저와 도강부대와 합류했다. ×관구사령부의 직할부대, 그리고 ○○사단도 뒤따라 진군해왔다. 이렇게하여 계획보다 1시간늦은 새벽 4시 혁명군은 수도 서울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염창교서 흩린눈물>
진압지휘부의 장도영참모총장. 그가 예하부대에 대한 긴급지시와 진압수배를 일단락 지은것은 자정전. 그러나 가장 중요한 상부에의 보고는 제쳐놓고 있었다. 장총장이 반도호텔의 장총리률 깨운것은 새벽2시가 조금못된 시간. 그러나 보고내용은 급박한 사태와는 달리『○사단에서 장난하려는것을 막아놓았고… 아무 염려마시고 그런일이 었었다는것만 알고계십시오』였다. 잇달아 직속상관인 현석호 국방장관에게 연락했다. 『반란이 일어났으니 임시 지휘본부인 특무대로 나와 사태를 수습해야겠읍니다』-바로 조금전 총리에게 행한 보고와는 어긋나는 긴박한 목소리였다.
당시의 국방장관 현씨의 회고.

<나는 보궐선거 지원을겸해 강원도로 갔다가 ×군단을 시찰하고 나홀만인 14일에야 돌아와 피곤했다. 그래서 이날은 반도호텔 국무회의가 끝나자 곧장 집에 자리에 누웠는데 비상벨이 잠을 깨웠다. 『반란이 일어났읍니다』는 장총장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찔하여 잠시 말을잊고 있다『누가 하는 것이오』하고 물었더니 박정희소장이 주동이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어디있느냐고 특무대입니다. 빨리 나오셔서 사태를 수습해 주셔야겠읍니다고 대답해왔다. 총리께 연락했느냐고 물었다. 장총장은 『방금 피신하라는 연락을 했읍니다』며 나와달라는 재촉이었다. 일어나 지프에 몸을 싣고 심야를 달리는데 한심하더군. 군일부의 움직임이 수상쩍다는 정보가 있을때 마다『그럴리 없습니다. 걱정마십시오』라고 했고. 박정희소장등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먼저 해명까지 했었던 터였다. 방첩대에 도착하니 10여명의 참모와 정신이 없는듯 했다. 최전방의 상황을 『군일부의 동요에 상관말고 경계를 강화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염려없다』고 하고, 서울의 사태도 곧 수습될것이라는 얘기였다. 작전지휘에 바쁜 그와 논란을 벌이기가 뭣해 바라보고 있자니 끝내 못미더웠다. 3시쯤 윤대통령에게는 연락했느냐니까 그제서야 전화를 거는것이었다.
또 『미8군사령관에게는?』하고 물으니 안했다고 했다. 기가 막히지만 나는 영어가 서툴러 전화를하라고 했더니 「매그루더」사령관에게 간략한 사태보고를 하면서『곧 사태가 안정될것 같다』고 하는것이 아닌가. 『무슨 소리냐. 그렇지 않으니 다시 하라』고 채근하여 다시 전화를 걸고났을때가 3시30분. 바로 그시간에 육본이 혁명군에 접수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총리가 걱정이돼 그곳을 나왔다. 그때는 이미 총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육참총장태도 애매>
현국방이 자리를 뜬 잠시후 장총장도 방첩대를 나와 육본으로 자리를 옮겼다. 혁명군과 육본수뇌진의 대책회의, 장총장의 8군사내왕, 그리고 회의가 끝없이 계속됐다. 새벽엔 해·공군총장, 그리고 해병대사령관이 육본으로 와서 혁명군과 자리룰 함께했다. 그러나 사태는 유동적이었다. 장총장의 애매한 태도가 혼미의 근원이었다. 그 긴장의 밤이 밝고 이윽고 아침 9시, 모든것이 미결인채 군 수뇌진은 청와대로 향했다.
3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그리고 혁명군의 박정희 소장 유원직 대령이 청와대접견실에 자리룰 잡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석호국방장관도 이자리에 동석해 있었다. 현국방은 반도호텔로가 장총리의 피신을 확인하고 방첩대로 되둘아오다 혁명군에 체포되어 시청에 연금되어있었다. 그런 현장관이 이자리에 올수 있었던 것은 도중에 들률곳이 있다며 육본을 먼저나선 장도영총장이 시청에 둘러 현장관을 동행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이 감도는 청와대 접견실, 이윽고 대통령 윤보선씨가 접견실로 나왔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서 대통령을 맞이했다. 대통령이 착석하고 뒤따라 군부수뇌가 자리에 앉았을때 침묵을 깬것은 윤대통령. 독백과도 같은 제1성이 나왔다. 『올것이 왔구나.』윤대통령은 왜 『올것이왔구나』라고 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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