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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前대통령 '재산목록' 놓고 법정 설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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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산 한푼 없이 무슨 돈으로 골프를 치고 해외여행을 다니나?"(신우진 판사)

"전직 대통령이라 골프협회(골프장경영협회 지칭한 듯)에서 그린피는 내주고, 그동안 인연있던 사람들이 이래저래 도와준다."(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명시 심리 재판은 오전 11시30분쯤부터 30분 동안 진행됐다.

全씨는 비교적 조용한 어조로 심리에 임했으나 추징금이 부당하다는 주장을 할 땐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날 재판은 그에 대한 2천2백4억원의 추징금(1997년 4월 확정) 중 미납분인 1천8백90억원을 낼 능력이 정말 없는지를 가리는 자리. 서울지검이 재산명시 신청을 낸데 따른 것이다. 1996년 12월 '5공비리'와 관련해 법정에 나왔던 全씨는 6년5개월 만에 판사 앞에 다시 섰다.

은행예금 29만1천원을 현금 재산목록으로 제출한 全씨는 판사에게 "추징금 낼 돈을 정치자금으로 다 써버려 더 이상 돈이 없다"며 '무일푼'임을 주장했다.

그런 그에게 辛판사는 배우자.직계 가족.형제자매 등 친인척에 대한 재산목록까지 추가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全씨는 이날 오전 11시24분 이양우 변호사 등 측근들과 경호원 등 10여명과 함께 법원에 나왔다.

그가 정문 안 포토라인(사진기자를 위한 촬영 대기선)에 서지 않고 옆문을 통해 법원청사에 들어오는 바람에 사진기자들이 촬영을 위해 몰려들면서 경호원들과 심한 몸싸움도 벌어졌다. 그의 출석 여부가 불확실해서인지 법정에는 방청객이 30여명에 불과했다.

◆판사와의 설전=15만원.14만원.1천원이 든 예금통장 3개와 부동산.골동품.예술품.악기.사무기구.기계류 등을 적은 재산목록을 검토한 辛판사가 자료의 정확성을 묻자 全씨는 "사실대로 적은 것이다. (이것 외에)본인 명의는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타인에게 명의신탁한 재산도 없는가"라고 재차 묻자 "그렇다"고 말했다.

辛판사는 "주위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全씨에게 "그렇다면 왜 측근들과 가족이 추징금을 안 내주는가"라며 따졌다. 그러자 全씨는 "검찰이 (그토록 많은)추징금을 물린 것은 정치자금을 인정하지 않고,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되받았다.

全씨는 추징금 중 이미 낸 것과 사용처가 확인된 것을 빼고 남은 1천5백억원을 "다 정치자금으로 썼다"고 주장했다. 이에 辛판사는 "일반인도 벌금 낼 때 돈이 없으면 벌어서 내거나 빌려서 낸다. 추징금은 어떤 것이든 내야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방 끝에 辛판사는 결국 全씨의 부인 이순자씨와 도서출판 시공사 대표인 장남 재국씨, 동생 전경환씨 등의 재산목록까지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全씨의 재산이 가족에게 대부분 명의신탁돼 있을 것이라는 의심에 따른 것이다. 이에 全씨의 변호인인 이양우 변호사는 재판 후 辛판사를 찾아가 "이번 재판은 여론재판"이라며 "채무자가 제3자에 대한 재산목록을 명시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辛판사는 "일전에 全씨 재산 61억을 압수했을 때도 가차명 계좌를 사용하다 적발됐던 것"이라며 "집행이 15%도 안 된 상황에서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썼는지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全씨의 진술은 종종 화제가 되곤 했던 그의 통 큰 씀씀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폐암으로 타계한 코미디언 이주일(본명 정주일)씨의 한 측근은 全씨가 그를 병실로 문안 간 자리에서 거액의 금일봉을 줬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 측근은 금일봉의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은 채 "수천만원"이라고만 전했다.

◆향후 추징 쉽지는 않을 듯=全씨는 97년 5월 무기명채권 1백88억원을 몰수당한 뒤 ▶97년 10월 현금자산 1백24억원▶2000년 10월 낙찰가 9천9백만원 벤츠 승용차▶2000년 12월 낙찰가 1억1천만원 용평콘도 회원권 경매 등을 통해 지금까지 3백14억원(추징률 14.3%)을 납부했다.

같은 혐의로 2천6백28억원을 추징당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2천73억원(추징률 78%)을 몰수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검찰은 최근 추징금 환수를 위해 가압류 중인 30여평 규모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全씨 자택의 별채(시가 6억원 상당)에 대해 법원에 경매신청을 냈다.

하지만 이것이 검찰이 받아낼 마지막 법적 재산일 가능성이 크다. 5백여평에 달하는 본채는 이순자씨 명의로 돼 있고, 장남 재국씨 역시 출판재벌이지만 全씨와는 무관함을 주장한다.

검찰이 앞으로 제출될 친.인척 재산 목록을 파악하더라도 당사자들이 부인하는 한 명의신탁 여부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

윤창희.한애란 기자

◆재산명시 신청=채권자가 재산이 있으면서도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의 재산을 공개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제도. 지난해 민사집행법이 신설되면서 추징금에도 재산명시 신청이 가능해졌다.

법원은 채무자가 제출한 재산 내역이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재산명시 이후에도 채권자의 신청에 따라 공공기관.금융기관에서 채무자 명의의 재산을 조회할 수 있다.

또한 채무자가 재산명시 절차를 불이행하면 경찰서 유치장 등에 최대 20일간 구금할 수 있다. 허위 재산목록을 낸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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