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대사논쟁 열쇠 쥔 광대토대왕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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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광개토대왕 비-.
고대동북아시아사의 제1급 사료이자 한-일 고대관계사의 최대의 쟁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광개토대왕 비를 중공이 국보중의 국보로 중시, 최근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음이 알려져 한국 민의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1880년에 발견
지금도 이역만리 만주 집안현 벌판에 서 있는 6m남짓한 석 비. 너비 약 1m60cm, 두께 약 1m40cm의 거대한 자연석을 손질해서 전후좌우 4면에 1천8백 여자의 대형 한례체로 음 각한 대왕의 공적 기념비다.
이 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호태왕비(광개토대왕 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호태왕 사후 2년 즉 414년에 그의 공덕을 기려 비를 세웠다.
비는 방주형으로 높이 6.l2m 폭 1.40∼1.85m이며 4면에는 44행의 비문이 매 행 41자씩 합쳐 l천8백 여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극히 귀중한 문화재다. l961년 3월4일 국무원에 의해 통구 고분군과 함께 제1급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인정되었다』고 씌어 있다.
「제l급 전국중점문물」은 중공전체에서도 약 1백80건밖에 없다.
l880년 이 비가 발견된 이래 한-일 두 나라 학자들을 중심으로 2백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끌어온「백년전쟁」의 초점은 비문 제1면 8행과 9행 사이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 32자.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일인학자들은 이를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 민이므로 조공을 해 왔으며 ▲신묘년(38l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적 파해 왜의 신 민으로 만들었다고 해석, 고대일본이 4세기에 한국을 식민지 경영했다는 주장을 펴 왔다.
이에 대해 국내에서 첫 반론을 편 것은 위당 낭인보씨. 그는 l955년, 「도해파」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침공했으나 이에 고구려가 바다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고 해석했다.

<일부 변조주장도>
한편 재일 학자 이진희씨는 l972년 11윌 동경대 사학대회에서, 대왕의 비문이 일본군인에 의해 발견, 소개될 당시 일부 변조되었다고 주장, 논쟁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씨의 변조 설은 50여종의 탁본과 사진을 연구한 결과 비석이 발견될 당시 군사지리 연구 차 이곳에 와 있던「사꾜」대위가 탁본을 뜨면서 고대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정벌한 것처럼 비문의 일부를 조작하여 옮겨 놨고 그후 일본군 참모본부가 이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 비석 전면에 석회질을 했다는 주장.
그는 신묘년 기사 중「왜」자와「도해파」3자를 조작된 부분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원로사학자 이병도 박사는 72년 12윌, 탁본으로는 비문의 조작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고 비문의 해석은 글자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 그 과장적 과시적 문 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사학자 천경자씨는 73년 1월,『광개토대왕의 최대 업적은 요 하로의 진출이었다』고 말하고 그러나『종래 일본사학은 능 비를 소위 남선 경영 논의 중요한 근거로 삼으려는데 급급했고 한국사학은 그 도전에 대한 반격에 노 심한 나머지 능 비의 대 왜 작전에만 관심을 집중시켰을 뿐 역사적인 요하 작전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첫 쌍구가묵본(척본 후 글자부분을 제외하고 먹칠한 것) 돌 뜬 사람이 주구라는 일본의 스파이였고 ▲그가 쌍구가묵본을 떴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져 왔으며 ▲이 탁본의 해석을 일본군 참모부가 했다는 사실로 미뤄 조작의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쟁이 거듭되는 동안 74년에는 한·중·일 3국학자들이 이 비문을 공동 조사하자는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구구한 자구해석>
77년에는 재일 언어학자 김인경씨가『탁본 중에 일본인밖에 쓰지 않는 천자어휘와 용법이 보인다』고 주장, 그 조작의 가능성을 높였으며 79년에는 정두희씨(전북대 교수·한국사)가 신묘년 기사를『왜는 신묘년「이래」(내)고구려가 비로소 바다를 건너 격파해 복속 시켰다』고 해석하여 새로운 견해를 보였다.
또한 천경자씨는「내도해파」의「파」자를 「고」자로, 김영만씨 (단대)는「유래조공」의 「내」자를「미」자로, 「황해」를「우 적」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l년에는 이형구씨(정신문화 연)가 탁본의 서체연구를 통해「왜」는「후」,「내도해」는 「부분인」의 조작이었다고 주장,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대왕 비의 건재함을 알리는 이 한 장의 사진은 2차대전 후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서 반가운 안부편지와도 같은 것.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81년 8윌, 중공의 길림성 문물 국이 향후 1∼2년 안에 광개토대왕 비를 외국인에게 공개하기로 약속했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이 사진은 일반공개에 앞서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사진에서 일제 만주국 당시에 건립되었던 육각형형의 보호 각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중공의 문혁 기간 중 손상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학계는, 국내외의 탁본연구에 대한 공동노력과 한·중·일 3국학자들의 현지답사에 의한 공동연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 한일고대사의 쟁점을 풀고 일제식민사견을 극복함은 물론 고구려인의 웅대하고 진취적인 기상이 크게 드러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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