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목적'서 '작업남' 변신 박해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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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런 놈이니? 깜짝 놀랐다." 영화 속 유림(박해일)과 오래된 연인 희정(박그리나)처럼

5년 사귄, 그러나 '부모 같고 자식 같은' 관계는 절대 아니라는 박해일의 여자친구가 '연애의 목적'(10일 개봉) 시사회 후 그에게 던진 첫마디다. '국화꽃 향기''살인의 추억''인어공주' 등으로 쌓아올린 무채색 '순수남'에서 뻔뻔스런 '작업남'으로 돌변한 박해일(28)의 연기는 이렇게 5년을 함께한 여자친구마저 놀래줄 만큼 성공적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남자의 변신은 유죄?

5월의 마지막날에 만난 박해일은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도 여자친구를 모르고 있었다"며 예의 그 떨리는 입술로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굉장히 예민하더라고요. 아, 여자구나, 싶었죠."

사실 어느 맘 좋은 여자친구라도 "지금 젖었어요?"라는 도발적 대사로 시작해 화끈한 노출까지 마다 않는 이 심상치 않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 무덤덤할 수 있을까. 결국 '그의 본색과 그녀의 본심이 발칙하게 드러난다'는 영화 홍보문구는 묘하게도 박해일과 그의 연인을 설명하는 말이 돼버렸다.

"시사회 후 술 한잔 마시면서 다 털어버렸구나 싶었는데, 지금도 여자친구는 '이 영화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깬다'며 자주 전화를 해요. 현재 찍고 있는 영화('소년 천국에 가다')에 몰입해야 하는데 자꾸 유림을 생각하게 해서 한번은 제가 화까지 냈다니까요."

영화로 야기된 사랑싸움은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아니 박해일이 남녀 관계에 대해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단지 관계가 오래 간다는 것만으로는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서로 끊임없이 대화(소통)하지 않으면 영원히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연애의 목적'은 겉만 보면 여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처음 만난 여자에게 "연애만 하자"며 대책 없이 작업을 거는 영어교사 유림과 작업의 대상인 교생 홍이(강혜정)의 밀고 당기는 연애 이야기가 전부다. 그러나 적나라한 섹스, 섹스보다 더 자극적인 대사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냄새는커녕 남녀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떡고물에만 정신이 팔려 영화를 고른 관객조차 "내게도 한번쯤 이런 순간이"하는 파격적 연애를 꿈꾸게 하는 그런 매력 말이다. 그리고 이 매력은 유림을 정말 유림답게 표현한 박해일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어렵다.

박해일은 알려진 것처럼 연극을 하긴 했지만 무대가 좋아 무작정 대학로에 뛰어들진 않았다. PC통신 구인난에 올라온 한 아동극 예술단원 모집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응모했을 정도니까. 무얼 하느냐보다 얼마 받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정작 돈은 못 받고 만날 술만 얻어먹었다. 그런데 사람이 좋고, 무대가 좋아 무조건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의 출세작인 연극 '청춘예찬'을 본 임순례 감독에게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출연 제의를 받고 얼떨결에 영화에 데뷔했다. 연기도, 영화도 떠밀리다시피 했지만 영화를 고르는 것만큼은 달랐다. 특히 '연애의 목적'은 그랬다.

"유림은 전작 '인어공주'의 맑고 순수한 우편배달부와는 여러모로 상반되는 캐릭터잖아요. 사람들이 좀 놀라겠다, 싫어하겠다, 뭐 그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죠. 저와는 멀리 있는 누군가라서 더 호기심이 갔어요."

원하는 걸 했으니 이제 관객과 대화할 일만 남았다는 박해일, 과연 얼마나 소통할 수 있을지-.

글=안혜리,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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