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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구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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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투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비슷하다. 성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70% 정도 미리 결정된다. 나머지 30%는 무대 현장에서 정해진다. 전투도 연주와 비슷해서 오랜 준비를 거친 끝에 단 몇 시간으로 승부가 결판난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의 카이사르 편)

승부는 우연이 아니다. 사전에 준비한 대로 가려진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지휘자의 선곡과 곡의 해석이다. 전투에선 승부처를 잘 준비해야 한다. 카이사르는 언제나 군사를 신속히 이동시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싸움을 했다.

정치의 세계, 특히 선거 승부도 70%는 미리 짜인 선거구도에 영향을 받는다. 선거 구도는 오케스트라로 치면 선곡이고 전투로 치면 승부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때 4자 필승론을 선곡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YS대세론을 승부처로 삼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P지역연합론을 개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패.반칙.특권 청산론은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을 눌렀다. 전체 선거판을 주도해 성과를 낸 선거 구도들이다.

한국에서 대선 구도는 지난 몇 년간 유권자의 집단의식에 형성된 갈증을 중심으로 짜인다. 대선 구도는 종종 시대의 결핍이자 요구이다. 그래서 시대정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쟁력 있는 대선 구도는 급조가 불가능하다. 대선 6개월~3년 전 싹트기 시작해 광범위한 유권자의 반응을 거쳐 선거날이 다가올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구도에 예민하게 주목하면 선거날이 닥치기 전에도 70% 확률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김헌태씨는 열린우리당의 지난 1년간 이미지가 무능.태만.혼란이었다고 했다. 한때 대선승리 전문당을 자처했던 집권 세력 중 일부는 이런 추세라면 2년 뒤 대선에선 필패라고 자조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대선 예비주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선거 구도의 윤곽을 공동으로 그려 가고 있다. 선진화, 소득 3만 달러, 촘촘한 사회안전망 같은 것들이다. 유권자의 갈증이 간결하게 반영됐다. 이런 요소들로 구도가 짜이면 선거판을 주도할 가능성이 있다.

열린우리당도 올 초에 선진화 컨셉트를 제시하긴 했는데 진지함이 부족했다. 공소한 논쟁과 관념이 승했다. 이게 오늘날 한나라당에 선거 구도의 주도권을 내준 이유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