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19. 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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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구봉서(右)씨와 함께 출연했던 영화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한 장면.

아세아 악극단은 나름대로 족보가 있는 단체였다. 광복 전에 활동하던 '성보 악극단'과 '조선 악극단' 그리고 광복 후에 생겨난 'KPK'에서 뛰었던 배우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래서 배우들의 연기력도 상당한 편이었다. 나에겐 제대로 연기를 익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유랑극단에선 별별 일이 다 터졌다. 하긴 젊은 남녀 배우들이 전국을 떠돌며 합숙을 하는데 어찌 우여곡절이 없을까. 한번은 꼼짝없이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내가 밤에 여자를 덮쳤다는 것이었다.

한여름이었다. 우리는 천안.예산.홍성.공주.청주.조치원을 거쳐 대전에 도착했다. 밤인데도 더위가 살인적이었다. 수시로 우물가에서 등목을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아예 마루에다 돗자리를 폈다. 산 채로 '백숙'이 되느니 차라리 모기한테 뜯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누구야, 저놈 잡아라!"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쏜살같이 내 앞을 지나갔다. 이어서 속옷 차림의 여자 단원들이 뛰쳐나왔다. 누가 방에 들어와 옥이란 주연 여배우의 몸을 더듬었다는 것이다. "남자 단원의 짓이 틀림없어요." "당장 잡아내야 해요." 옥이는 미처 얼굴은 못 봤다고 했다.

그때 한 선배 단원이 마루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나의 따귀를 때렸다. "어째 수상하다 싶었다. 마루에서 잔 이유가 뭐야?" 여배우들의 방 바로 옆이 마루였다. "모기가 이렇게 많은데도 마루에서 잔 이유가 뭐냐니까!" 이번엔 발길질이 날아왔다. 마당에 있던 선배들까지 올라와 몰매를 때렸다. 매질 끝에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았다. '이럴 때 김화자가 있었더라면 내 결백을 믿어줄텐데.' 억장이 무너졌다. 공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점심 때였다. 무대장치부의 고씨가 들어왔다. 아침 일찍 극장에 나가 무대 세트를 세우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단원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더니 무릎을 쳤다. "삼룡이는 범인이 아냐. 내가 진짜 범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단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만취한 상태로 잠들었다가 소변이 너무 마려워 일어났지. 변소에 가려고 모퉁이를 도는데 여자 고함 소리가 들렸어. 그리고 어떤 사람이 대문 옆 남자 배우들 방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가더라고. 그 뒤에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너무 취해 뻗어 버렸어."

"삼룡이는 그때 어디 있었지?""마루에요." "맞아. 그럼 삼룡인 범인이 아냐. 범인은 따로 있어." 그 말에 나는 꺼이꺼이 서럽게 울고 말았다. 체면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단장과 고참 배우들이 조사에 나섰다. 그 방에서 잔 남자 단원은 모두 네 명이었다. 하나같이 '아세아 악극단'에 처음 들어온 연구생들이었다. 단장이 개별 심문에 나섰지만 자백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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