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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5) 제76화 아맥인맥(4) 「이당 화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내가 서병은씨(이당 매부)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서울권농동161 이당댁을 찾아갔을 때, 화숙인 이당의 사랑채에는 그림공부를 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문앞에는 위창(오세창)이 지었다는「락청헌」이란 당호가 붙어 있었다.
이당은 소개펀지를 읽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당신옆에 앉히고 좌중의 제자들에게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림공부를 하게된 여주사는 장우성이란 청년』이라고 수인사를 시켰다.
첫눈에 봐도 이당은 굉장한 미남자였다. 이무렵에 나와 함께 이당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향당 백윤문 일관 이석호 규당 한유동 취당 장운봉 운보 김기창 심원 조중현 운당 조용승 현초 이유태등이다.
이매 운보는 운포, 심원은 기산, 현초는 소영이라는 아호를 썼다.
이당화숙은 서당식이었다. 아침 먹고 가고싶은 시간에 가서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다.
책상다리를 하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먹을 갈고 물감을 풀어 종이든 비단이든 자기가 가지고 온걸 내놓고 모사를 했다.
나보다 두어달 먼저 이곳에 온 운보는 머리를 박박 깎고 것이 높은 학생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당선생님도 나는 연치가 아주 높은 노인장으로 알았는데 건강한 40대 중년이었다.
내가 19세에 이당문하에 입문했으니까 정획히 계산해서 그때 이당선생의 나이는 나보다 20연장인 39세밖에 안되었다.
그런데도 위엄이 대만했다. 이미 조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터여서 그때 벌써 중진화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에게 그림을 가르쳐준 심전(안중식) 소림(조석진)선생이 돌아가신지가 10년이 지난 때여서 위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당은 락청헌에 놀러온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붓놀림을 하다가도 누가 무어라고하면 『응 그래, 그녀석 고약한 놈이군』하고 말참견을 했다.
이때 우리의 공부방법은 이당선생이 주문 그림 그리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는게 고작이었다.
전시회라도 출품할라치면 스케치를 해가지고 와서 이당선생께 보여야했다.
그러면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지적을 해주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고쳐서 가지고 가면 『옳지, 무던히 됐군』하고 그림을 봐주었다.
내가 이당 문하에 들어간 1931년께는 이당선생이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던 때다. 매일 목이 아프다고 목에 목드리를 두르고 김용채병원에 통원했다.
이때 이당사랑에 자주 놀러다니던 사람은 화가인 무호 이한복 심향 박승무와 한문학자인 해려 임상종이 있었다.
무호는 효자동 칠궁앞에 살고 있었는데 동경미술학교를 나와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쓰는 서화가여서 익히 아는 터었다. 이 어른은 서화미술학교 1회졸업생이어서 이당보다는 1년선배였는데 서로 너나 하면서 터놓고 지냈다.
심향도 원서동에 살았는데 이당댁에 가끔 왔다. 자리에 앉으면 입바른 소리 잘 하고 남의 흉을 곧잘 꼬집어 내 건 욕질을 하곤했다.
한문학자인 해려는 유난히 뚱뚱뚬했다. 나중에 경기중학에서 한문도 가르쳤는데 경상도 말인데도 빠르지 않고 씩씩거리면서 느릿느릿 해 이당에게 『말좀 빨리 하라』고 지천도 많이 들었다.
지금도 안잊혀지는 사람은 얼굴이 곰보인 이주사라는 분이다. 이 양반은 우리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문을 열고 빠끔히 들여다보고 이당선생이 있으면 냉큼 들어오고 안계시면 그냥 돌아가버렸다. 머리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게 바르고 기생오라비처럼 항라두루마기를 입고 맥고모자를 쓰고 단장을 짚고 잔뜩 모양을 내고 다녔다.
생김새도 그랬지만 이주사는 화류계통이어서 가끔 이당선생을 술자리로 끌어내곤 했다.
권농동 이당댁 바로 앞은 대나무를 잘 그리는 일주 김진우집이고, 바로 아래는 당대의 명필이던 성당 김돈희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일주는 이당댁에 가끔 놀러왔지만 성당은 꿈에 떡얻어 먹기로 1년에 한번쯤이나 들렀다.
성당집은 마당에 화초가 많아 우리들이 곧잘 들어가서 스케치를 했다.
그집 마당에 있던 접시꽃(촉규화)을 그려 이당선생에게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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