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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4)제76화 화맥인맥(3)|위당댁 출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비록 1년의 시한부이긴 했지만 그림공부를 위한 나의 상경은 우리집안으로서는 파격적인 용단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먼길을 떠나는 나에게 서찰2통을 들려 보냈다.
한통은 이당 (김은호) 선생의 매부 서병은씨가 이당께 써준 소개장이고, 또 한통은 아버지가 위당 (정인보) 어른께 보내는 친필이었다.
아버지와 위당은 오래 전부터 교유가 있어 편지내왕이 있었다. 어쩌다 위당이 여주에라도 올 양이면 꼭 외사리에 들러 이민응 삼서집과 우리집 사랑을 어김없이 다녀갔다.
여주는 육조가 들끓어 서울선비의 내왕이 찾았다. 여주에는 벽절로 불리는 신륵사가 있고, 세종대왕의 영릉도 있으며 송우암의 대노사가 있어 일제시대에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목은 이 색이 은거했다는 「제비여울」(연나)도 이곳에 있고 여흥 민씨 시조묘도 이곳에 있다. 민비의 고향이 장호원이고, 이완용의 생가가 여주읍에 있었으며 한말세도가이던 안동 김씨 별장이 곳곳에 있어 여주 고을은 그야말로 서울장안을 방불케 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여주읍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사리까지 서울의 제채기 소리가 들렸다.
위당은 간혹 이민응씨 집에 들러 우리아버지와 학술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그림재간을 보이기 전까지는 속으로 위당같은 문장가가 되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막상 나를 그림 공부하라고 서울로 떠나 보내면서도 미련이 남아 위당에게 『가돈을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나는 서울 와서 지금 단성사 뒤편에 있는 봉익동에 하숙을 했다.
내가 19세때 상경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봉익동은 서울의 주택가로 소문이 나있었다.
나는 셋째 숙부 장인(원정한)댁에 하숙을 정했다. 숙부의 악장(강인)은 영천군수를 지낸 분인데 소실을 두어 노경에는 아예 작은 마나님 집에서 기거했다. 사돈어른은 영천군수를 지냈다고 사람들이「원영천」이라 불렀다.
원영천어른 소실은 인물도 훤하고 솜씨도 좋았다. 내가 사돈댁 총각이어서 인지 대접을 후하게 했다 .
나는 하숙을 정하고는 맨 먼저 아버지 서찰을 가지고 위당 어른댁을 찾아갔다.
위당댁은 지금 서대문 미동 국민학교 자리 미근동에 있었다.
방에 들어가 큰절을 하고 서찰을 내놓았더니 위당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그래, 사서삼경을 다 읽었으니까 이제는 역사공부를 해야지』하고는 나를 빤히 들여다봤다.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니 무슨 책이 그리 많은지 방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몇겹으로 쌓여 있었다.
좌우로 책이 빽빽이 놓여있어 사람이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위당은 나에게 조선역사에 관한 책 한 권을 빼주면서 틈틈이 읽어보라고 했다. 체구는 작은 어른이 목청은 어찌 큰지 쩌렁쩌렁 울렸다. 그야말로 쇠소리가 나는 금속성이었다.
이 무렵 위당댁에는 얼마전에 타계한 동교 민태식씨와 성균관장을 지낸 운정 성악서씨가 와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나는 위당과 벽초가 둘도 없는 친구인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사돈간이란 말을 듣고 이분들이 친구이상의 정을 나누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당은 한학자일 뿐아니라 역사에도 밝아 연전교수로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사학자 고홍이섭박사와 언론인 조풍연씨등이 연전에서 위당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이다.
위당이 연전재직시에 상을 당해 굴전제복(굴건제복)을 하고 방립(방립)을 쓴 채 강단에 섰던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다.
내가 위당댁에 드나들 때만해도 그 어른은 한여름에도 솜둔 버선을 신고 다니셨다.
이만큼 양반의 체면을 중히 여기던 분이어서 아랫사람 대하는 법도 엄격하셨다.
나는 이당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도 무상으로 위당댁을 출입했다.
위당은 글자보다는 정신을 중히 여겨 내게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심어주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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