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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화·도자|도자기는 한국의 지방박물관 수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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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0면

북한문화재의 도자·회화부문은 질·양면에서 한국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빈약하다. 특히 고려청자·이조백자등의 도자기는 모두를 합쳐도 한국의 1개 지방박물관소장 수준에도 못 미친다.
회화도 북한측이 내세우는 단원 김홍도의『구룡폭도』(지본묵화 29cm×42cm)·평양조선미술박물관소장)와 안견작품으로 알려진 『용도』(지본묵화25cm×36cm·조선미술박물관소장)등 몇점을 재외하고는 거의가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조선초 증화는 양적으론 도자기보다 풍부한 편이지만 거의가「민화」로 취급될 정도의 질이 낮고, 같은 대가의 작품들이라도 한국박물관 소장이나 민간 컬렉션이 수장한 것들이 훨씬 뛰어난 것들이다.
북한 도자기나 회화문화재의 이 같은 초라함은 우선 일제 때부터 시작된 근대박물관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평양부립박물관과 개성부립박물관 밖에 없었는데 이들 박물관의 성격이 서울 총독부박물관이나 이왕가박물관에 부속된 지방박물관에 불과했다.
따라서 소장품이 빈약했고 대부분의 전시문화재들을 서울로부터 대여받는 형편이었으므로 해방후의 북한박물관 소장문화재 (도자기·회화)도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1949년11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대적인 개성박물관 소장품 이송이 북한 도자기·회화의 알맹이를 뽑아낸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개성박물관은 일제 때 한국인 부윤이 고려자기 2점을 관비로 매입, 부립박물관을 설립하면서부터 고려자기의 「보고」가 됐다. 개성박물관은 고려의 행도였다는 점등으로 총독부박물관소장품인 고려자기를 대여 받아 진일해오다가 해방을 맞았다.
김대원 국립중앙박물관장은 49년 송악산 사건으로 사태가 긴급해지자 사람을 보내 개성박물관 소장의 중요문화재 31상자(전소장품의 90%)를 서울로 이송시켰다.
개성박물관 문화재의 서울이송은 현지주민들의 반발등에 부닥쳐 1차 실패했으나 끝내 김관장의 고집으로 성공했고 결국 몇달만에 6·25전쟁이 돌발했다.
김관장의 독단적인 이 같은 처사는 문교당국에 시말서까지 쓰는 견책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문화재사상 다시없는「큰 수확」이었고 현재 한국이 북한에 월등한 도자기·회화문화재를 보유하게된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현재 북한 조선미술박물관(평양)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볼만한 회화들로는 『고려불화』1점과『왕초상화』(16세기·1백63×87cm), 김명국의『편복선인도』(17세기·25×34), 정선의『옹천파도도』(18세기·1백1×47cm)등의 조선초 회화를 손꼽을 정도-.
북한 회화문화재중 안堅의 것으로 알려진『용도』와 『고려불화』『왕초상화』등은 한국에 없는 것들이고 이암의『화조묘구도』(15세기·87×44), 이암의 『묵죽강』(16세기·24×35cm), 김두량의 『목우도』(18세기·31×51)등이 볼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자기는『이조백자십장생부각문잔』등 이조자기2, 3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볼 것이 없다. 회화는 해방 후 국내출판물에 소개된 일이 거의 없고 안견의 『용도』정도가 최근일부 국내 일간지를 통해 소개됐을 뿐이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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