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 CEO 장수비결 믿음 주면 은퇴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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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등산복 등 아웃도어 의류를 만들어 파는 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의 조성래(51) 사장과 덴마크계 펌프 제조판매 업체인 한국그런포스펌프의 이강호(54) 사장. 외국계 기업의 한국인 사장인 두 사람은 16년 이상 자신의 회사를 맡고 있다. 조 사장은 20년째 이 회사 사장이다. 기업의 오너가 아닌데도 이들은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직접 만나봤다.

▶ 조성래 사장이 자유의 여신상처럼 꾸민 본사 거트루드 보일회장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 20년째 컬럼비아스포츠 사장 조성래씨

"신뢰가 최고죠. 저는 아마도 신뢰를 바탕으로 사장이 됐고 그 때문에 계속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성래 사장의 말이다. 그는 1980년 부산의 한 미국계 신발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학사 장교를 마치고 집에서 놀다가 '아이 분유 값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그때까지 그의 영어 실력은 초보였다. 일본인 지사장이 외국에 보내는 텔렉스를 보고 무역 영어를 익혔고, AFKN을 시청하면서 듣는 실력을 키웠다.

그러다 2년 뒤 직장을 옮겼다. 또 다른 미국계 신발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며 사업을 맡을 사람을 구했는데, 첫 직장의 일본인 지사장이 20대인 그를 추천했다. 그 뒤 섬유업체 고어와 컬럼비아스포츠웨어가 한국 지사를 세울 때도 지인들이 조 사장을 추천했다. "신뢰를 쌓은 덕에 추천받은 게 아닐까요. '예스(Yes)'했으면 어떻게든 해내고, 못 할 것은 분명히 '노(No)'라고 하는 게 제 성격이어서…."

이 회사는 2003년 정기 세무조사에서 단 1원도 추징당하지 않았다. 성실히 납세하겠다는, 사회와의 약속도 지킨 것이다. 그렇게 신뢰를 쌓았기 때문인지 장수 최고경영자(CEO)가 별로 없는 미국 기업의 한국지사 사장이면서 한 번도 본사로부터 '퇴직'에 관한 얘기를 들은 바 없다고 한다. 그는 CEO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보세요.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것도 아니고, 처음엔 영어도 못했고…. 열심히 하면 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있게 도전하세요."

▶ 이강호 사장과 한국그런포스펌프의 캐릭터인 ‘뽐뿌맨’. 펌프를 잘 알리기 위해 한국지사가 디자인했다. 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 17년째 그런포스펌프 사장 이강호씨

"덴마크 기업들은 사장을 채용할 땐 원래 그렇게 장기 계약을 한다더군요."

겸손한 표현이다. 이강호 사장은 "그 같은 회사 정책 때문에 오래 사장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1989년 덴마크의 그런포스펌프가 한국 진출을 모색하며 사장을 찾을 때 지원했다. 그 전에는 유원건설의 뉴욕지사장과 해외사업본부장을 지냈다. "해외 사업을 하다 보니 유수의 다국적기업 CEO가 한번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런포스펌프가 한국 사업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고 사장에 지원했죠."

본사 임원들이 한국에 와서 최종 후보 두 명을 뽑았다. 마지막으로 덴마크 본사에 가서 그룹 회장 등 고위 임원 10여 명이 앉은 가운데 하루종일 토론식 면접을 했다. "제가 될 것 같은 확신이 생깁디다. 사장이 되면 배짱으로 '10년 정도 계약하자'고 주장하려고 했는데 웬걸, 60세까지 22년 계약하자고 본사가 먼저 내미는 거예요. 알고 보니 많은 덴마크 기업이 사장의 정년을 정해놓고 계약한다더군요."

이 사장은 "그러나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계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며 "회사가 쪼그라드는데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강심장을 가진 사장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그런포스펌프는 외환위기였던 98년을 빼고는 해마다 고속 성장했다. 이 사장에 따르면 매출 100억원을 넘은 게 2000년인데, 지난해에는 460억원으로 늘었다. 비결은 그저 "직원들이 열심히 해서"라고 했다. 이 회사는 경기도 용인의 캐리비안베이,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수원 월드컵경기장 등에 펌프를 납품했다.

권혁주 기자<woo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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