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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별 볼 일 있는 날] 유연석, 야누스 칠봉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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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악역에서 달콤한 순정남까지. 유연석의 스펙트럼은 넓다. ‘화이’(오른쪽)에서는 냉혹한 킬러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출세작 ‘응답하라 1994’의 부드러운 순정남 칠봉은 그를 스타덤에 올렸다.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소재로 한 영화 ‘제보자’. 박해일이 희대의 사기극을 파헤치는 방송사 PD, 유연석이 논문 조작을 제보해 사건의 물꼬를 트는 연구원으로 출연한다. “참된 언론의 역할에 집중했다”는 임순례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끝까지 진실을 추적해가는 박해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도심 곳곳에서 마주치는 영화 포스터에는 박해일 뒷쪽에 서있는 유연석이 더욱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포스터의 기세만으로는 박해일이 조연으로 보일 정도다.

 지난해 신드롬급 인기를 끈 출세작 ‘응답하라 1994’ (tvN)이후 유연석(31)의 행보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부드러운 순정남 칠봉에 대한 여성 팬들의 여전한 지지를 뒤로 한 채, 차기작으로 사회파 드라마의 지식인 제보자 역할을 택해 주목받았다. 연기는 합격점이다. 가족과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연구원의 복잡한 심리를 잘 표현해냈다. 소재 자체의 폭발력에 ‘완전대세’ 유연석의 가세 등으로 ‘제보자’는 순조롭게 흥행 중이다.

 최근 tvN 예능 ‘꽃보다 청춘-라오스’편의 주인공도 단연 유연석이었다. ‘응답하라 1994’ 멤버인 손호준, 바로와 함께했다. 출연 제안을 받는 자리에서 맨 몸으로 곧장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 준비 없는 여행기였다. 그는 여행 내내 동료들을 이끄는 리더 겸 가이드 역할을 해냈다. 틈틈이 가이드북을 챙기고, 예약을 도맡고,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동료들의 심리 상태를 배려하는 세심한 모습으로 첫 회만에 ‘연석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세 출연자 모두 솔직하고 연예인 같지 않은 민낯을 드러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알려진 대로 유연석은 ‘응답하라 1994’ 이전까지 10년의 무명 세월을 지내온, 미완의 대기다. 그것도 악역 전담반이었다. 2012년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는 이제훈의 첫사랑 수지를 함락시키는 강남 선배, ‘늑대소년’(2012)에서는 박보영·송중기 커플을 방해하는 못된 주인집 아들로 나왔다. 하필이면 국민여동생 수지를 공략하고, 하필이면 늑대분장을 해도 꽃같이 아름다운 송중기를 괴롭혔다. 가히 ‘국민 비호감’이라 할만 했다. 이어 ‘화이’(2013)에서도 주인공 여진구 일가를 추격하는 악독한 킬러로 나왔다. 피비린내 나는 액션을 펼치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MBC ‘구가의 서’(2013)에서는 이승기·수지 커플의 조력자였으나, 여기서도 적들의 최면에 걸려 의도치 않은 훼방꾼이 됐다.

 이같은 악역 전문에서 ‘순정의 짝사랑남’ 칠봉으로의 변신은 드라마틱했다. 귀공자풍의 곱상한 얼굴에 야구선수라는 설정에 맞는 각진 어깨와 건장한 체격. 유순한 소년의 얼굴에 건장한 남자의 몸이 결합돼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듯한 이미지였다. 따뜻하고 매너 좋은 칠봉이 동네오빠 ‘쓰레기’(정우)에게 연인(고아라)을 빼앗기자, 팬들의 안쓰러움은 더욱 커졌다. 안 그래도 도회적인 외모와 달리 지방 출신에, 오랜 무명으로 지난한 과거사를 겪었다는 게 오버랩됐다. 팬덤이 나서서 응원하며 지켜주고 싶은, 순수하고 착한 청년의 이미지가 굳어졌다.

 최근 ‘힐링캠프’(SBS)에 출연한 그는 목가구나 수제 화장품 제조 등 자신의 취미를 공개하며 “정신을 집중케 하는 이런 잡기들이 무명시절을 버텨낸 힘”이라고 말했다. 유지태의 어린 시절로 나온 데뷔작 ‘올드보이’(2003) 이후 자신만 안 떴고, “딱 10년만, 30살까지만 가보자”고 다짐했다는 그다. 본인에겐 고통스러웠겠지만 뒤늦은 인기 덕에 31살임에도 20대 초반 신인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것이 강점이다. ‘응답하라 1994’ 신원호 PD는 “전작들의 우울하거나 악한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 말은 거꾸로 로맨틱한 칠봉이 말고도 다른 역할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뜻이다.

 유연석은 ‘제보자’ 이후 임수정과 호흡을 맞추는 ‘은밀한 유혹’, 한석규·고수와 함께 하는 ‘상의원’, 문채원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그날의 분위기’ 등 3편의 영화를 잇따라 선보인다. 로맨스에서 스릴러까지 하나로 꿰기 어려운 다채로운 작품들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동료들과 함께 제작진을 골탕먹이던 그는 금방 돌아서 후회 했다. 제작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꽃보다 청춘’ ‘힐링 캠프’에서 엄마 얘기를 하면서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힐링캠프’에 나와 눈물 흘린 연예인이 한 두 명이 아니지만(심지어 반감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모습이 카메라를 의식해 연출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유연석의 힘이다. 순수청년 칠봉이가 그랬듯이 진심과 선의의 힘을 믿게 만드는 배우. 이제 다시 스타트라인에 선 그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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