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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백년」의 주역들 <3>|타작기·벼베기기계등 농기구도 사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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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는 암흑 속에서 태어나 광명한 사회로 여행한 후 이제 다시 암흑 속으로 되돌아왔소. 나는 아직 내 앞을 분간할수 없읍니다만 곧 알아볼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소.』
생생한 체험이었고 솔직한 고백이었다.
근대문명의 어둠속에서 태어났던 민영익은 1883년 7월16일부터 다음해 5월31일까지 꼭 10개월 보름동안 찬란한 근대문명사회로 들어가 살았다.

<수호조약 답례로>
민영익은 귀국 사흘째인 6월2일 미공사관으로 초대주한미국공사인 「푸트」장군을 찾아가 그렇게 소감을 밝혔다.
민영익-. 갓 23세의 홍안청년은 서양에 대한 조선왕조의 첫친선사절이자 수천년 한국역사에서 최초의 서양나들이기도했던 대미친선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는 민비의 조카이자 당시 전성기의 세도를 부리던 친청수구파 민씨일문의 촉망받는 신진 정객이었다. 때문에 개화파영수 김옥균은 한미수호조약의 체결과 미공사의 부임에 대한 답례사절 대표로 민문의 신진기예 민영익을 천거했다.
그런 배경에는 김옥균의 개혁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서려있었다.
대미친선사절단은 전권대신에 민영익, 부대신에 홍영식, 참사관에 서광범, 수행원에 유길준·고영철·변수·최경석·현흥택등 조선인8명과, 통역으로 청·일인각l명, 수행비서로 미국인「퍼시벌·로웰」등 11명으로 이루어졌다.
역사의 기연이랄까. 사절단이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까지 타고간 배는 공교롭게도 12년전 조선원정에 나서 강화도침공작전에 참전했던 미해군전함 모노카시호였다.
일본에서 근 한달을 머무른 사절단의 동점은 동경에서조차 큰 관심을 일으켰다고 뉴욕타임즈지는 9월3일자에 보도했다.
『조선사람들은 그들의 괴이한 의복과 독특한 몸가짐때문에 동경에서 대단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인들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놀랄만큼 노골적이었다. 그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은채 그들 고유의 국악을 반복하여 들으면서 마치 감옥생활을 자진해서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이 9월2일 아라빅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닿은 후에는 서양문명의 새로운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기라도 할듯 아주 활발하게 행동해 동경체류때와는 딴판이었다.

<미, 조선시장노려>
이틀간 「쇼필드」소장의 안내를 받으며 환영연에 참석하고 산업시설과 미국조폐국을 시찰하는한편 관광도 했다. 융숭한 환대를 받은 배경에는 이 고장출신으로 지역검찰총장을 지번 「푸트」공사의 배려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이브닝 크로니클지는 9월3일 『샌프란시스코시가 하나가 되어 조선사절에 적절한 대접만 베푼다면 그에 대한 댓가는 반드시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한다. …미국은 바로 조선에 눈을 돌려 교역을 열어야한다. 조선인구는 약 1천5백만명으로 지금 그들에게는 무엇이나 필요한 상황』이라는 「푸트」공사의 사신을 싣고 있다.
「푸트」공사는 샌프란시스코시민들에게 조선사절을 융숭하게 대접하여 『무엇이나 당장 필요한 1천5백만 인구의 잠재적 시장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권고한 것이다.
조선을 미국상품진출의 거대한 잠재적 시장으로 오판한 「푸트」공사의 이같은 관점은 「아더」대통령에게까지 연장된다.
그렇지 않고는 민영익일행이 76일간의 미국체류에서 미국측으로부터 받은 극진한 환대를 달리 설명할 길이 별로없다.
중앙일보특별취재진이 미의회도서관에서 찾아낸 뉴욕타임즈지의 당시 보도내용처럼 미국 땅에 나타난 조선사절이 『미국인들에게 깜짝 놀랄만큼 신기한 새로움』이어서일지도 모른다.
사절은 미주횡단철도를 타고 시카고에 도착, 남북전쟁의 영웅 「쉐리단」중장의 영접을 받고 「최선의 대접」을 받았다고 「푸렐링휘센」국무장관이 「푸트」공사에게 편지했다.
9월13일 워싱턴에 도착한 사절은 「데이비스」국무차관보와 「포크」해군소위의 영정을 받고 미정부의 국빈으로 알링턴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원래는 사절의 안내자로 한미조약체결자인 「슈펠트」제독이 최적임자로 선정되었으나 그의 일이 바빠 「포크」가 임명됐다.
그러나 사절은 17일 「아더」대통령이 머무르던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로 다시 옮겨야했다. 뉴욕에 도착한 민영익일행을 보도한 17일자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사뭇 흥미있다.

<티파니서 쇼핑도>
『아마도 이 땅을 밟은 최초의 조선민족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들의 기이한 복장과 태도는 수많은 미국인의 주목과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고 말한 이보도는 관과 탕건, 그리고 관복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했다.
타임즈지는 또 『그들의 두발은 면도를 하지않고 아직도 3인치나 되는 상투를 틀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수염이 적게 나는 민족이긴 했으나 그 얼굴에는 긴머리카락이 늘어져 펄럭이고 있었고 콧수염과 턱수염도 드문드문 나있었다』고 말하고 『외출복은 관복과 대동소이했는데 다만 화려한 색을 가진 독특한 모양의 도포를 더 입고있어 아주 환상적이고 기이하게 보였다』고 건했다.
18일 상오11시 호텔 대청 중앙에 「아더」대통령, 그 오른쪽에 「프렐링휴센」국무장관, 왼쪽에 「데이비스」국무차관보등이 서있는 가운데 민영익을 필두로 조선사절이 일렬로 들어섰다.
『사절일행은 대통령을 향해 일렬로 섰다. 전권대신의 지시로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서서히 앞으로굽혔다.
2, 3분동안을 꼼짝없이 있다가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대통령과 대관들은 사절을 향해 선채로 머리를깊이 숙여서 인사했다. 다음에 국무장관이 앞으로 나와 민대사를 인도하여 대통령에게 소개하자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후 통역을 통해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뉴욕헤럴드지)
그리고 민영익은 한국말로 장중하고 유쾌하게 대통령앞에서 공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희들은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대통령과 미국민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양국민은 영원히 평화와 행복속에 살게되기를 바랍니다.』
민대사는 이어 국왕의 친서와 신임장을 「아더」대통령에게 제정했고 대통령은 답사에 나섰다.
『우리 미국은 다른 국민을 지배하거나 그 영토를 획득할 의사는 없고 다만 우호관계와 정직한 교역을 주고받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는 귀국과 사귀게 됨으로써 미국에 이익을 주리라 믿으며, 귀국 또한 우리의 농구와 영농방법, 공업기술의 개량과 진보를 알게될 것이며 이는 곧 귀국이 미국에 준 이익을 보상하는 댓가를 우리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데 귀국도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교육제도와 법률제도에도 귀국이 채택할 부분이 있을줄 믿습니다.』
사절일행의 대통령접견실에서는 또다른 기묘한 장면이 연출됐다. 민대사가 한국말로 하면 일본어를 아는 유길준등이 일본어로 일본인수행원에게 전달하고 그다음에 일본인이 영어로통역하는 3중통역이었다. 미국측의 의사도 그 역순으로 전달됐음은 물론이다.
대통령과의 접견이 끝난후 사절일행은 센트럴파크에서부터 시범농장·방직공장·의약제조회사·해군연병장·병원·전기회사·철도회사·소방서·육군사관학교등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시찰했다.
그들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심지어 양품점과 유명한 티파니보석점을 구경하기까지했고, 그리고서는 적지 않은 쇼핑도했다.
뉴욕타임즈의 한 기자는 민영익이 어린애용 노란 장갑을 한켤레 사서 계속 끼고다니는 것을 보고 서양복장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민대사는 『서양의복은 매우 인상적이긴하나 조선의상이 훨씬 아름답다』고 대답했다. (타임즈지 9월27일자)
29일 워싱턴에 돌아온 사절은 매일 국무성에 나가 귀국에 대비한 정보수집과 한미간의 정기항로 개설문제, 군사·교육등 각 방면에 미국인고문을 맞이하기 위한 교섭을 국무장관및 담당관리들과 벌였다. 한편으로는 재무·내무·농무성등을 방문, 유관정보의 수집과 협력가능성을 타진했다.
미국정부는 조선사절의 어러가지 요구에 진지하게 협력할것을 약속했다. 「슈펠트」제독은 84년2월에 예편하면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가겠다고 쾌락 (결국 실현되지 않았지만)했고, 농무성은 종자를 보내주겠다고 다짐했다.

<유럽들러서 귀국>
민영익은 또 10윌15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과학이나 제조업에 관한 것이면 무슨 물품이라도 수입할 용의가 있으며 특히 광업과 농업에 관한 것이면 더욱 좋겠읍니다』라고 미국제품의 수입의사를 표명했다. 실제로 사절은 타작기·벼베기기계·저울등 농기구18품목(7백51달러33센트어치)을 구입하기도했다.
사절은 10월13일 백악관을 공식방문, 고별인사를 했다. 이자리에서 「아더」대통령은 사절의 왕복및 모든 경비를 해군성이 대신 지출하도록 조처했고 특히 민영익등 3명의 사절이 유럽과 수에즈운하를 거쳐 귀국할수 있도록 미군함 트렌튼호의 승선표를 주었으며 「포크」소위를 끝까지 수행토록했다.
민대사는 서광범과 변수를 자신의 수행원으로 지명하고 홍영식등 4명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귀국토록 했다. 그는 또 남아서 공부하길 원한 유길준에게는 학자금을 주어서 주저앉게 했다.
사절은 많은 자료와 미국화폐의 완전한 수집품등을 받기도 했지만 스미소니언국립박물관에 조선 약용식물의 표본을 기증하기도 하여 미국에서 최초의 문화교류를 기록했다.
민영익일행은 11월16일 뉴욕에서 트렌튼호를 타고 유럽의 파리·런던·로마등지를 돌아본후 인도를 거쳐 84년5월31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귀국도중 서광범과 변수는 쉬지않고 그들이 본 사물을 기록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열성을 보였지만 민영익은 휴대한 공자의 서적을 읽는데 정력을 소비했다고 「포크」소위는 국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니까 『나는 눈이 부시는 것같은 광명속에 갔다온 것같다』고 피력한 홍영식이 서광범·변수와 같이 갑신개혁을 주도한 것과는 반대로 민영익은 『세계를 일주하고도 저렇게 완고하고 어리석을 수 있느냐』는 윤치호(당시 미대사관통역)의 한탄처럼 한층 민씨일문의 친청정책에 동조했는지 모른다.
글 이수근기자
사진 채흥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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