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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젖은 두만강』이 인기 높다는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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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눈물젖은 두만강』『목포의 눈물』등 이른바 「흘러간 노래」들이 오늘날에도 가장 즐겨듣고 즐겨 부르는 인기도높은 노래라는 사실이 최근 한조사에서 밝혀졌다. 마침 필자의 『한맥원유』란 책이 출간되었으니 가요쪽의 그같은 현상을 「한맥원류」의 눈으로 볼수 없겠느냐하는 것이 중앙일보의 청탁이었다. 그 청탁은 슬픔내지 눈물을 원한과 엮어서 얘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었지만 그 시사는 상당한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쉽사리 시인할 수 있었다.
슬픔이나 눈물이 그대로 언제나 원한인 것은 아니지만, 원한이 슬픔과 눈물을 머금고 있는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한이 꽤나 복합적이란 것을 의미하고 있다.
원한은 슬픔과 앙심이라는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음산한 두개의 극을 하나의 축끝에 지니고 있다. 눈물 머금은 슬픔은 침울하게 가라앉은, 그리고 생기가 퇴화된 상태인데 비해서 앙심은 공격적인, 앙분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 둘은 원한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원한은 가학적이면서 아울러 자학적이다.
공격적인 앙심이 가학적인데 반해서 눈물의 슬픔은 더러 자학을 더불게 된다. 그리고 너덜너덜 불평을 털어놓고 한숨을 토해낸다. 이것을 흔히 넋두리거나 푸념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그것도 서민들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팔자얘기>는 으례껏 이 푸념과 넋두리로 흉하게 점철되게 마련이다.
한국인이 자신을 말할 때의 기본적인 문법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한탄 빼고는 신세 얘기를 하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이 스스로의 역사를 말할 때에도 이 문법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보장할수 없다.
원한이 약자에게 맺힐수록 이 앙심과 슬픔, 가학과 자학의 양극성이 한결 격화되고 심화된다. 한국의 대중가요가 강자와 승자를 노래한 경우는 거의 없는줄 안다.
그러기에 눈물과 슬픔과 한숨으로 얼룩진 대중가요는 <원한>이란 말을 대단히 즐겨한다. 『원한 맺힌 가슴에…』라는 가사가 있고 『한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제목이 있고 『…가슴이 멍이 들었소』라고 외쳐댄다. 그러고 보면 원한과 눈물, 원통과 슬픔은 이땅의 대중가요가 변함없이 지켜온 단골 낱말임을 알게된다.
원한은 또 과거에 집착한다. 원한이 비롯되기 이전의 좋았던 과거를 회억하면서 원한으로 얼룩진 어두만 과거를 좀처럼 가슴에서 떨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원한의식 속에서 과거는 빚과 어둠, 밝음과 그늘의 양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대중가요가 강한 추억성으로 뒷걸음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한은 매우 각박하고 원색적인 감정으로 채워져 있다. 순화되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맨 핏덩이만 같은 충동적 감정이 원한의식을 부추긴다.
이땅의 대중가요 가사가 거의 노출광적으로 원색의 감점을 드러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슬픔의 감정을 가진것도 인간뿐이라고 하지만, 그 슬픔에 질의 등급이 매겨져 있는데에 슬픔의 인간다움이 있다. 가장 숭엄한 슬픔이 비극이나 비장이라면 무기력한좌절, 그리고 그에 따른 맥빠진 체념에서 비롯되는 퇴행적인 슬픔이 감상이다.
슬픔은 기쁨이 그렇듯, 생에서 불가피할뿐만 아니라 생의 요소이기도 하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보지않은 자는 삶을 말하지 말라』고 했을때 슬픔은 삶의 긍정적인 본질로 높여져 있기조차 한 것이다. 슬픔 그 자체가 나쁜게 아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슬픈 아름다움>내지 <아름다운 슬픔>에 차 있다고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음악에 감상이없다고 한 거장 「카를·뵘」의 말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슬픔이 없다고 한 것은 아닐것이다.
슬픔이 비장하지도 비창하지도 않은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슬픔에 고뇌가없고 그리고 허무에의 저항감이 없기에 문제가 생기는것이다. 슬픔이 너덜너덜 흐느적거리니까 말썽이 빚어진다.
소녀처럼 몇번 훌적거려서 끝날 슬픔이라면 이미 슬픔이 아닌지도 모른다.
『저녁 잘 먹고 물에 빠져죽는다』는 속언이 일러주듯 무게없는 감상은 뜻밖의 함정이 되어 삶을 위협한다.
삶에서 아주 몰아낼수 없는 슬픔, 그것을 고뇌를 거쳐 이겨 섰을 때, 눈물은 이슬이 된다. 슬픔에 탐닉하는 사람의 얼굴에 눈물은 증기처럼 추하게 엉겨 붙는다.
인생에 있어 슬픔은 가령 장애물경주에 있어서의 장애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슬픔과 고뇌의 장애물경주라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원한이 그 어두운 감정의 골짝을 헤매는 동안, 남들과 세계를 향해서는 저주를, 자신을 향해서는 자학하는 눈물을 쏟는다. 원한의식이 언제나 이 암담하고 긴 골짝속을 헤맨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경향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골짝 끝 낭떠러지에 다다라 전락의 참화를 겪은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땅의 대중가요, 그것도 누구나 즐겨 부르고 즐겨 듣는다는 노래가 이 전락직전의 골짝에서 응얼거리는 음산한 <백조의 노래>에 가깝다는 것은 그렇게 크게 반겨질 일은 아닐 것이다.
더욱 『눈물젖은 두만강』은 북간도 쪽으로 광복의 염원을 안고 떠나간 <님>들에 대한 그리움을 깔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민족의 비원을 눈물의 회억으로 얼룩지게 하면서 그것을 지금에 부르고 노래한다는 데에 더욱 문제가 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슬같은 눈물이 오래 불러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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