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마케팅] 亞 소비자 ‘집단 분노’는 함께 쌀농사 짓던 문화에서 비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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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20면

아시아 지역에서 분노의 전파 속도는 서양 사회보다 빠르다. 사진은 지난해 말 항공기 출발이 지연되자 한목소리로 거칠게 항의하는 중국 소비자들. 이 장면은 미국·영국 언론의 뉴스거리가 됐다. [사진 CNBC]
중국 관영 CCTV의 기업 고발 프로그램 ‘3·15 완후이’의 방송 장면.

매년 3월, 중국에서는 굴지의 글로벌 기업도 긴장하게 하는 기업 살생부가 공개된다. 3월 15일 ‘세계 소비자의 날’을 맞아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이 한두 기업을 선정해 불량제품, 부패상 등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치는 특집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 ‘3·15 완후이(晩會)’를 방송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권리를 침해한 기업으로 지목되면 제품·서비스를 대폭 개선해야 함은 물론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나서서 공개 사과해야 한다.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은 기업은 이후 한동안 수난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③ Rice 문화, Face 문화

2012년에는 글로벌 업체인 월마트와 맥도널드가 수난을 당했다. 유통기한을 넘긴 식품을 팔거나 오래된 식재료를 사용한다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됐고 두 회사의 공식사과가 잇따랐다. 2013년에는 폴크스바겐의 변속기 결함이 보도돼 차량 38만 대 이상이 리콜됐다. 이 밖에 애플은 제품 보증·교환에 있어서 중국 소비자를 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 지적을 받아 관련 원칙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올해는 일본 카메라업체 니콘의 제품 불량과 중국시장에 대한 애프터서비스(AS) 차별이 집중 보도됐다.

공공의 적으로 지명된 기업이 융단폭격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순식간이다. 먼저 CCTV 특집 프로그램에 이어 후속 TV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방송된다. 여기에 정부기관들이 가세해 해당 기업의 소비자 권리 침해를 공론화하고 감독을 강화하기 시작하면, 소비자들 사이에 분노는 빠르게 확산된다. 폴크스바겐은 CCTV 방송 후 채 일주일도 되기 전인 3월 21일에 리콜을 했고, 중국 시장에서 콧대 높기로 유명했던 애플도 CEO 팀 쿡이 4월 5일 공개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중국어로 게재했으니, 소비자들의 성토에 얼마나 시달렸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 리트윗 속도, 서양의 여덟 배
분노의 전염 속도는 한국도 뒤지지 않는다. 2002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미국 선수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박탈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 직후 한국은 반미 감정으로 들끓었다. 당시 미국 선수가 모델로 활동했던 나이키는 물론 맥도널드·스타벅스·코카콜라·폴로 등 100여 개의 ‘사서는 안 되는 미국 제품’ 리스트가 떠돌았다. 여기에 미국 언론이 이 상황과 관련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흘 만에 무려 120여 개의 미국제품 불매운동 사이트가 개설됐다.

소비자 공분은 순간적으로 증폭되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유지되면서 시장 판도를 뒤집어놓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남양유업은 영업사원의 폭언으로 비롯된 갑을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제품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비윤리적인 경영 행태가 소비자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집단 공격이 시작됐다.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이어졌고, 일부 매장은 해당 기업 제품을 모두 회수 조치했다는 사실을 매장 곳곳에 써 붙이면서 선 긋기에 나섰다. 결국 남양유업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기준 적자를 기록하고 1위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패션·맛집 소식부터 기업의 잘못과 실수, 근거 없는 소문까지 다양한 정보가 급속도로 퍼지고 그 영향력도 크다. 한 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트위터 이용자들이 10개의 멘션을 받을 때 평균 한 개를 리트윗하는데 반해 한국 이용자들은 평균 8개를 리트윗한다. 소문의 확산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범위도 넓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소셜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은 평양에서도 몇 시간이면 정보가 입소문을 타고 도시 전역으로 퍼진다고 한다. 이러한 집단성은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 다양성이 존중받는 서양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는 공항에서 항공기 출발이 지연되자 한목소리로 거칠게 항의하는 중국 소비자들의 ‘기이한’ 모습이 미국·영국 언론의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물길을 공유하며 벼농사를 함께 짓는 아시아인들은 밀농사 지역민들에 비해 공동체적 삶을 살고 따라서 집단 내 분노의 전파 속도도 빠르다. 사진은 강원도 철원 소이산에서 내려다본 논 풍경. [중앙포토]
쌀 문화권 학생이 그린 사회적 관계도. 자신의 원지름을 타인보다 평균 4mm 더 작게 그렸다.

쌀생산 문화가 체면 문화로 이어져
아시아 문화권에서 분노의 전파 속도는 왜 상대적으로 더 빠를까. 최근 한 연구는 공통된 생각과 행동, 동질감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의 근원을 동양의 ‘쌀 문화(rice culture)’에서 찾아 눈길을 끌었다. 버지니아대학교 연구원인 탈헬름(Talhelm)은 “동양에서 집단주의, 서양에서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이유는 쌀과 빵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맨땅에서 자라는 밀과 달리 벼는 고인 물에서 자라기 때문에 한 마을의 여러 농가가 물길과 논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인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 전체가 하나가 돼 힘을 모아야 할 일이 잦을 수밖에 없다. 쌀 문화는 상호협력이라는 미덕을 낳았지만, 동시에 집단적 스트레스·우울감과 같은 공동체적 반감과 집단적 공격 행동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논문은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쌀 농사, 밀 농사를 짓는 지역의 대학생들에게 자신과 친구, 동료 등 주변인들을 원으로 그려 연결하는 사회적 관계도를 그리게 했다. 그 결과 쌀 농사를 짓는 지역의 학생일수록 자신을 타인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로 표현한 것이다. 미시간대 문화심리학과 기타야마 교수의 연구에서도 미국인과 독일인들은 타인보다 자신을 각각 평균 6㎜, 3.5㎜ 더 큰 지름의 원으로 그렸지만, 일본인들은 자신을 더 작게 그렸다.

이는 타인을 크게 의식하여 남의 시선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동양의 ‘체면 문화(face culture)’로도 연결된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중요한 서양 사회에는 체면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체면을 세우거나(saving face) 체면을 구기는(losing face)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서구 기업들은 부랴부랴 체면이 무엇인지, 권장되거나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자기중심적(idiocentric)인 서구 문화에 비해 집단의 화합, 원만한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타인중심적(allocentric) 사회의 소비자는 불쾌감을 겉으로 드러내기를 주저한다. 언짢은 상황이라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 특히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점잖지 못한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동양권 소비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남과 공유하는 것으로 불쾌감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강하다.

‘Rice’‘Face’ 문화는 아시아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기업들에 딜레마로 작용한다. 제품이나 브랜드가 인기를 끌면 빠른 속도로 유행을 만들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집단적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쾌감을 느낀 소비자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를 꺼리는 한편, 주변사람들과 은밀히 나누는 뒷담화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분의 씨앗으로 자란다. 이유 없이 토라지는 사춘기 소녀 같다가도 뭉치면 불같이 화를 내고 공격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두 얼굴의 소비자들이다.

기업이 이러한 지역을 파고들려면 지혜롭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먼저 ‘우리(we-ness)’라는 명분을 내세워야 한다. 예를 들어 CJ제일제당은 주부들과 함께 시판 제품을 테스트하고 신제품을 기획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참여자들은 분명 우리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임할 것이다. 또 최근 삼성전자는 임직원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제 성과로 이어지도록 하는 사내 집단지성 시스템 ‘모자이크(MOSAIC)’를 도입했다. 회사 발전방향 토론방에는 열흘 만에 7만 명이 방문하고 4000명의 직원이 글을 올렸다고 하니, 그동안 표출되지 않고 누적된 개개인의 의견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 됨과 주인의식이 잘 어우러진 문화가 뒷받침된다면 기업 특유의 자산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소비자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

애국 마케팅 넘어 소비자 존중 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씁쓸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국산 제품을 해외에서 훨씬 낮은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어 온라인 시장을 통한 해외 직접구매 소비자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산 과자 과대포장 문제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제과업체의 실적이 하락하기도 했다. 이러다가는 소비자가 사라져버린 황량한 유령시장만 남게 될 수도 있다.

내수 시장은 한국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한 성장의 밑거름이자 기업의 근간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 잠시 이벤트성으로 벌이는 애국 마케팅 수준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한국인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 아무리 직장이나 사회에서 인기를 끄는 사람이라도 부모·형제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돌아갈 곳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순화 소비자학을 공부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퍼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했다. 현재 국내외 소비시장 트렌드 분석, 브랜드 관리 전략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반감고객들』(2014), 『I Love 브랜드』(공저, 201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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