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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취재일기

홍보 밥상 차버린 북한의 유엔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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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북한이 15년 만에 뉴욕 유엔 총회에 외교 수장을 보내고도 훌륭한 홍보 기회가 될 밥상을 걷어찼다. 미국 외교협회(CFR)는 미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싱크탱크 중 하나다. 유엔 총회 개최에 맞춰 뉴욕을 찾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로랑 파비위스 프랑스 외무장관 등이 CFR 연설을 활용해 국제사회의 현안인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자국 입장을 설명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그러나 “CFR 측에서 북한 이수용 외무상에게 연설 기회를 제안했지만 북한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른 소식통은 “1999년 이후 처음으로 북한 외무상이 유엔 총회에 등장해 외교 관계자들의 관심이 많았다”며 “CFR 외에도 일부 기관이 물밑에서 좌담·연설 등을 이 외무상 측에 제안했지만 모두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외무상은 대신 27일(현지시간) 유엔 총회에서 “(핵 보유는) 그 누구를 위협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 무엇과 바꿔 먹을 흥정물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조선 적대시 정책이 완전히 종식돼 우리의 자주권·생존권에 대한 위협이 실질적으로 제거된다면 핵 문제는 풀린다”고도 했다. 늘 듣는 앵무새 발언이다.

 이 외무상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이철’(가명) 전 스위스 대사다. 장성택 처형 후 숙청됐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외무상에 임명되며 최고지도자의 문고리 권력임을 보여 줬다. 그런 그도 국제기구에서 평양의 지시 내용을 발표하는 것 외에는 공개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북한에선 최상위 엘리트조차 현장을 독자적으로 지휘할 권한이 없다”는 촌평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이 외무상의 행보는 국제사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우리 얘기만 하겠다는 북한 식 외교의 반복이다. 북한은 이를 ‘자주 외교’라고 내걸겠지만 바깥세상에선 우물 안 개구리 외교일 뿐이다.

 유엔 총회 참석에 앞서 이 외무상은 ‘반미 동지’ 이란을 들렀다. 무함마드 자비드 자리프 외무장관과 회담하며 양국 관계를 과시했다. 하지만 유엔 총회장 바깥에서 두 사람은 행보가 전혀 달랐다. 이 외무상이 거절했던 CFR을 자리프 장관은 찾아가 연설하며 IS 퇴치에서 이란의 존재감을 부각하려 했다. IS 등장 후 이란에 쏠린 국제사회의 관심을 놓치지 않고 활용한 것이다. 벼랑 끝 외교 말고는 보이지 못하는 북한이 그래서 더 안타깝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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