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골수성백혈병 환우 500여 명 '희망의 길'을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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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ML DAY 행사에서 환우들은 연극을 보며 눈물 짓다가 코믹한 마임공연에 웃음을 터뜨리고,
강연을 통해 완치의 희망을 엿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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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의 생일이자 여러분을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마음껏 즐기세요.” 사회자의 멘트가 분위기를 띄운다. 이날의 주인공은 만성골수성백혈병(CML) 환우들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항상 불치병으로 그려졌던 백혈병. 그러나 CML 환우의 모습은 질병의 그늘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건강했다. 올해로 4회를 맞는 ‘2014 CML DAY’ 기념행사가 22일 서울성모병원에서 진행됐다.

눈물과 웃음, 희망이 공존했던 2014 CML DAY 행사 현장에 다녀왔다.

즉석사진전·퀴즈대회·코믹마임공연 펼쳐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피를 만드는 조혈모세포가 병든 백혈구를 만드는 혈액암이다. 흔히 알고 있는 백혈병은 급성백혈병을 말한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제때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가속기를 거쳐 급성백혈병으로 악화한다. 9, 22번 염색체에 이상이 생겨 발생하는 질환의 특성에서 착안해 매년 9월 22일을 CML DAY로 정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프랑스·독일·영국 등에서도 CML DAY 행사가 동시에 열린다. 이번 행사는 중앙일보헬스미디어, 서울성모병원 암병원, 루산우회(CML환우회)가 주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수도권뿐 아니라 강원·충청·전라·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온 500여 명의 환자가 참석했다.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즉석 사진전, 1대100 퀴즈대회, 코믹 마임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그중 환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KBS 공채 탤런트 모임 한울타리에서 마련한 희망감성 연극 ‘길’이다.

 무대 위의 한 부부. “자기, 약 먹을 시간이야. 지난주에 왜 병원은 안 갔어? 약은 잊지 말고 제때 챙겨 먹어야지.” 살뜰히 챙기는 아내에게 남편의 짜증 섞인 대꾸가 돌아온다. “바빠서 못 갔어. 약은 나중에 먹을게. 지금 한창 일하는 중인데 약 먹으면 흐름이 깨진단 말이야.”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던 부부는 결국 심하게 다툰다.

 약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아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환자, 5년 만에 생긴 아이를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환자의 아내, 사망한 환우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환우회 회원들…. 연극 속 인물의 모습은 곧 실제 환자의 일상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곳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투병 5년째에 접어든 환자 박점임(61·여)씨는 “모든 장면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공감이 갔다.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고 말했다.

표적항암제 치료의 관건은 꾸준한 관리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김동욱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김 교수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환자들은 필기를 하며 강의 내용을 꼼꼼히 가슴에 새겼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골수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이어서 사망률이 높았지요. 하지만 다행히 다양한 표적항암제가 개발되면서 장기 생존이나 완치까지 바라볼 수 있어요.” 2001년 최초의 표적항암제 글리벡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2세대 표적항암제(타시그나·스프라이셀·슈펙트·보슬립)가 잇따라 나왔다. 이어 1, 2세대 항암제를 대체할 이클루시그가 개발됐다. 그리고 최근 신약 ABL001의 임상시험이 시작됐다. 4세대 표적항암제로 분류된다. 김 교수는 “올 2월부터 세계 8명의 환자가 이 약을 투여 중이다. 그중 5명이 우리 환자다. 생존 예상기간이 3~6개월뿐이었던 환자가 이 약을 먹고 낫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표적항암제 치료의 관건은 얼마나 꾸준히 관리하는지에 달려 있다. 김 교수는 “대부분 진단 후 1년간은 열심히 치료받지만 투병 2, 3년이 지나거나 상태가 호전되면 약 복용을 소홀히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적항암제 치료는 ‘마라톤’과 같다. 꾸준함이 생명과 직결된다.

 환자에 따라 어떤 약을 얼마나 처방할 것인지 의료진의 선택도 중요하다. 치료제 종류에 따라 치료 결과가 달라지는 탓이다. 환자 홍동호(47)씨는 “치료제 부작용으로 운전 중 구토를 하거나 뇌경색을 앓는 등 여러 차례 고비를 겪었다. 하지만 신약 임상시험에 참가 중인 지금은 환자인 걸 잊고 산다. 영양제 먹듯 꾸준히 치료제를 복용하면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CML DAY는 환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1회째부터 꼬박꼬박 참석했다는 박점임씨는 “2009년 3~4개월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벌써 5년이 지났다”며 “혼자 있을 땐 무서웠는데 이렇게 환우들과 모여 서로 투병 얘기를 듣고 정보를 공유하다 보니 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황점연(61·여)씨는 “오늘 함께 온 남편이 ‘만성골수성백혈병이 이런 병인지 미처 몰랐다’며 다음에도 꼭 같이 오자고 했다. 언제 갑자기 악화될지 몰라 항상 겁은 나지만 교수님 강연을 듣고 완치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글=오경아 기자 ,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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