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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백일장 9월 장원 이유채 '용대리 가는 길'

중앙일보

입력

<장원>

용대리 가는 길

이유채

바다가 어루만진 속살까지 탱탱한 몸
배 밑창 숨 내리고 멀미 하냥 하는 사이
코 꿰어 끌려나온 너, 판화처럼 내걸린다

푸르게 일어서는 그 물결 다 지우고
맨살을 발라내고 환부 저리 드러냈나
금강송 장대에 누운 성스러운 순교자

세상의 길이란 길 바람으로 말리던가
지렛대 그 위에서 떠나보낸 푸른 그늘
피부에 와 닿는 불빛 눈 비비며 바라본다

버릴 것 다 버리고 가쁜해진 몸피인가
아픔마저 사라진 곳 닻을 내린 덕장에서
에움길 육탈의 시간 마른 등짝 묵직하다

◇이유채=1947년 인천 출생.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 2003년부터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들을 교재로 혼자서 시조 습작.

<차상>

빈 학교 저녁 풍경

양늘솔

창 긁은 길고양이 담장 너머 사라지자
밀린 숙제 줄긋다 만 알림장 수근수근
애들아 죽을 때까지 같이 놀자 바람소리

컴컴한 교실 퀭한 외등 눈빛 푸르스름
휴가 못간 그네 밀며 시이소오 쓰러지자
레퀴엠 비 소리 켜는 측백나무 그림자

책상 지문 땀 냄새 걸상 모두 입 다물고
칠판에 이름 적힌 불량식품 손가락이
폰 문자 왕따 화면에 이어폰 줄 감는 반

옥상에서 몸을 던진 장기자랑 현수막이
다음 학기 우수상 폭을 재는 벽 사이
긴 방학 미끄럼 타는 운동장이 소란하다

<차하>
벽거울, 그 안

김은진

여자는 나를 보며 겹겹이 화장하고
남자는 나를 보며 날렵히 면도한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그 틈새 공략한다

들숨날숨 연기 덮여 배후는 가려지고
웅크린 그림자는 발밑에 숨어든다
무심코 각인되어져 울부짖는 자화상

탈바꿈한 얼굴들 먼지처럼 사라져도
남 몰래 가둬 놓고 들춰보는 증명사진
제각기 한 곳만 향해 멍한 두 눈 꽂고 있다

황태가 익어가는 과정을 생에 대한 사유와 깨달음으로 묵직하게 풀어내

<심사평>

가을꽃들이 지천이다. 그 따뜻한 봄날 다 보내고 서늘한 계절에 꽃을 피우는 가을꽃들을 볼 때면 ‘자애(自愛)’라는 글자가 문득 떠오른다. 서둘러 피지 않고 묵묵히 제 때를 기다려 마침내 자기 꽃을 피워 올리는 여유와 자기 극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사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나 시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오래 인내하며 잘 익어 향기 짙은 작품을 내놓는 일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활짝 꽃피우는 그 소중한 임무수행을 위해 불볕더위를 견디며 자신을 갈고 닦는 창작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9월의 장원은 이유채의 ‘용대리 가는 길’에 돌아갔다. 용대리에서 황태 덕장을 떠올리는 착상이야 새롭지 않지만 황태가 익어가는 과정을 생에 대한 사유와 깨달음으로 묵직하게 풀어낸 점이 믿음을 샀다. 차상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양늘솔의 ‘빈 학교 저녁 풍경’을 뽑았다. 저녁 시간 텅 빈 학교의 고즈넉한 풍경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낸 재미있는 작품이다. 차하는 김은진의 ‘벽거울, 그 안’이다. ‘제각기 한 곳만 향해 멍한 두 눈 꽂고 있’는 거울에 대한 사유와 직관이 돋보인다.

결실의 계절이지만 설익은 작품이 많았다. 시조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선명하고 감각적이어야 하고 발걸음은 날개를 단 듯 가볍고 활달해야 한다. 글자 수만 맞춘다고 좋은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종장의 긴장과 이완의 율격미와 농축미가 떨어지면 시조는 맛과 멋을 잃는다. 자유시와의 차이점을 깨우치는 것이 좋은 시조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권갑하·이달균(대표집필 권갑하)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초대 시조>

주흘관을 지나며

박권숙

문경에 와서 문득 길이 새였음을 안다
긴 침묵의 부리로 석양을 쪼고 있는
거대한 저 바위들도 원래 새였음을 안다

죽지뼈 한 대씩을 부러뜨리며 길 밝히고

부신 뒷모습으로 재를 넘는 가을산

봉암사 극락전 한 채 봇짐처럼 떠메고

내게는 또 몇 개의 영과 재가 남았을까

그리움의 시위를 당겨 날개를 꿈꾼 이들

저렇게 새재를 넘어 먼 길 갔을 것이다

◇박권숙=1991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작품상, 최계락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시집 『그리운 간이역』 『모든 틈은 꽃 핀다』 등.

이 시에선 길도 바위도 모두 새가 된다

모든 성전에서 기도가 시작되었다. 입시의 계절이 오고 있다. 산천초목도 일월성신도 모두 신이 되는 시간. 온 세상이 오체투지하며 소지 올리듯 지극한 마음을 바칠 것이다. 하늘도 무심할 수 없는 피 말리는 날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입문(入門), 대저 문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제의처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관문들은 끝이 없다. 제물인 양 목숨의 죽지뼈를 바치고서야 열리는 문.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하룻길조차도 입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문경 새재, ‘주흘관’을 지나는 이 시에선 길도 바위도 모두 새가 된다. ‘죽지뼈 한 대씩을 부러뜨리며’ 힘들게 눈길 밝히고 부신 모습으로 재를 넘을 때 가을산도 ‘봉암사 극락전 한 채 봇짐처럼 떠메고’ 고개를 넘는 큰새가 된다. 아름답고 험한 그 길을 세상의 날개 없는 이들도 ‘그리움의 시위를 당기며’ 팽팽한 마음의 날개로 넘어야만 한다. ‘내게는 또 몇 개의 영과 재가 남았을까’ 화자가 묻는다. 설의적이다. 하루하루 근근한 일상이 영이고 재인 것을 알 뿐이다. 다만, 살아서 꿈꿀 일이 남아 있는 한, 마지막 죽지 한 대도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란 믿음을 가져 볼 밖에 없다. 이미 관문을 빠져나간 지 오래된 당신이 가지고 돌아올 소식은 무엇인가. 거대한 날개를 거느린 주흘관을 지나며 이 시는 풍경의 경이로움에 경도되지 않는다. 스핑크스적인 고단한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시어 하나와 피 한 방울을 바꾸며 목숨처럼 작품을 짜 올리는 박권숙 시인. 세상의 두서없는 엄살들은 그의 시에게 모두 들킨다. 박명숙 시조시인.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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