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섭의 시대공감] 신흥시장,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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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31면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신흥국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곧 경제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한다. 인도도 현재의 성장세를 지속할 경우 21세기 중반에 미국을 추월한다. 아프리가, 중남미, 동남아 국가들도 계속 커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신흥시장 진출은 경쟁국들에 비해 계속 뒤처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이 1980년대에 앞서 진출했던 아프리카, 미얀마 등에서는 이제 중국에게 한참 밀려났다. 동남아에서도 일본이 반격을 하며 자신들의 ‘텃밭’을 회복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이 그 페이스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 G20의 가교국(架橋國)이 되겠다며 개발원조도 크게 늘리고 개발경험 전수 사업도 많이 벌이고 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정부 따로, 민간 따로 일이 진행되면서 효과도 떨어지고 해당국들은 실제로 필요한 것을 제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민간 대 민간의 비즈니스만으로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흥국에서는 민간부문이 별로 발달해 있지 않다. 그 쪽의 정부를 상대할 수 밖에 없다. 중국에서 큰 사업을 하려면 중국 공산당을 상대해야 한다. 중동도,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흥국 진출은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필요한 것들을 패키지로 제공하면서 그 과실을 함께 나누는 ‘정치-경제-기업의 오케스트라’가 돼야 한다.

대우그룹은 비록 15년 전에 해체됐지만 신흥시장 진출의 선구자였고 ‘세계경영’을 통해 신흥국 투자를 어떻게 세계적 범위에서 엮어내는지에 관한 교본(敎本)을 제시했다. 한국과 같은 중진국에서 출발해 다른 신흥국으로 진출하려는 다국적기업들은 선진국 출신 다국적기업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자본력에 대항할 다른 무엇인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대우는 그 경쟁전략을 ‘복합화’와 ‘상생’에서 찾았다.

김우중 회장은 신흥국 지도자들을 만나 “당신 나라에 한국을 건설시켜 주겠다”고 얘기하며 큰 사업들을 따냈다. 만약 IBM이나 GM의 회장이 “당신 나라에 미국을 건설시켜 주겠다”고 말하면 신흥국 지도자들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이들은 기업경영은 잘 했을지 몰라도 경제개발 경험은 없다. 신흥국들이 당장 미국 수준의 선진국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도 없다.

그렇지만 한국은 최근에 ‘경제기적’을 일군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이 따라하고 싶은 자본주의였다. 또 대우는 다각화된 비즈니스 그룹이었기 때문에 경공업, 중화학, 무역, 자원개발, 금융 등 경제발전에 필요한 사업을 다 갖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중화학 부실을 해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체제전환국의 공업시설을 시장경제에 맞게 바꾸는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대우는 또 80년대 아프리카에 진출할 때부터 ‘50대 50 원칙’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익의 절반은 처음부터 현지국가를 위해 쓴다는 것이다. 교육, 인프라, 병원시설 등 현지국가가 필요한 일들을 해 줬다. 김 회장은 “처음에 돈을 적게 버는 것처럼 보여도 신흥국은 성장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돈을 더 크게 버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리스크를 처음부터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국가에 필요한 일들을 해주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최소한 불이익 받을 일이 없고, 그 쪽에서 고마와하게 되면 더 큰 사업을 준다는 것이다.

대우는 이 경영전략과 역량을 바탕으로 96년에 신흥국 출신 세계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떠올랐다. 2000년대에 세계경제 성장이 신흥국 발전에 의해 이끌려왔던 사실을 감안할 때에, 대우가 해체되지 않았다면 세계적 다국적기업으로 계속 뻗어 나갔고 한국경제도 그 과실을 많이 거두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대우가 시도했던 ‘세계경영’의 정신과 전략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한국경제가 21세기에 얼마나 잘 뻗어나갈 수 있는지 여부는 신흥시장 공략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흥시장에는 자본시장이나 하청업체 등 민간 역량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진출해야 한다. 정부와 지역주민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상생의 정신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세계화와 선진화가 선진국 따라하기, 재벌구조 개혁, 정경유착 끊기 등의 단어들과 많이 연결됐다. 그러나 대우의 해외진출, 특히 신흥국 진출 경험은 오히려 독창적인 진출 전략, 재벌구조 활용, 정경협력 강화를 통해서도 세계화와 선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한국경제의 발전을 위해 어느 길이 바람직한지 재검토해 봐야 할 때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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