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든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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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27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잘 알고 있다. 예수의 말씀 중 인류의 정신적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말씀 중 하나가 이것이다. 구약성경에는 부(富)의 위험을 경고하는 구절이 거의 없다. 유대인은 부를 좋아했고, 부를 축복의 결과로 여겼다. 아브라함이든 야곱이든 솔로몬이든 심지어 욥도 부자였다. 그들의 부는 영혼 구원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부터 부에 대한 사상이 현격하게 바뀌었다.

신약의 사상은 부자에게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도의적 책임을 묻는 수준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부자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의인이라고 해서 금세에서도 특권을 누리고, 내세에도 VIP 대접을 받으며 들어간다고 명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 돈이 없어 금세에서도 고생을 하고, 내세에도 좋은 곳에 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못 박지 않았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예수는 “부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명쾌하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부의 위험 자체만을 언급했다. 오늘날 기독교 목사와 달랐다. 오늘날 목사는 부자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천국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듯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특별히 부자를 찾아가려 하지 않았고, 부자에게 별도의 과외 수업도 하지 않았다. 오직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말씀만 전했을 뿐이다. 돈이 많은 자체가 영혼에 위험하다는 말만 언급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거지 나사로가 좋은 곳에 간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다. 부자는 그냥 부자라는 이유로 음부에 갔고, 거지는 거지였기 때문에 좋은 곳엘 갔다.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부자가 되면 영혼에 위험이 될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상대적이다. 2000년 전 부자는 오늘날 기준으로 봤을 때 부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전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시대에 살지 않았나. 스스로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의 상당수는 객관적으로 볼 때 부자가 아니다. 그저 넉넉할 뿐이다. 그런데 사실은 큰 부자도 아니면서 자기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처럼 억울하고 아찔한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왜 부자는 위험한가. 부는 인간을 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죄악을 추구할 수 있는 도구가 되며, 불의를 생각만 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실행하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보다 땅에 연연하게 하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부자는 어쩌면 진짜 부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부자는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원히 땅에서 살고 싶어 한다. 영원히 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 굳이 천국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과거 모 재벌기업 총수는 아래 직원이 “백수하십시오”라고 건배를 하자, 고깝게 생각해 그를 해고했다는 소문이 있다. 100세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부자는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자기 얼굴이 그려진 돈, 자기 이름으로 지은 건물,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로 세상을 채우려 한다. 그러기에 진짜 부자는 하늘나라에 관심이 없다. 하늘나라에선 모두가 원천적으로 평등해지지 않던가. 반대로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다. 그는 잠시 물질을 맡은 사람에 불과하지 그것을 영원히 누릴 권세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겸손이요, 신앙이다.



김영준 예일대 철학과와 컬럼비아대 로스쿨, 훌러신학교를 졸업했다. 소망교회 부목사를 지낸 뒤 2000년부터 기쁜소식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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