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개선 표시한 한국 … '아베의 승리' 라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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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도쿄 총국장

링거까지 맞으면서 역주한 박근혜 대통령의 유엔 순방 일정이 끝났다.

 순방 기간 중 박 대통령의 대일본 발언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총회 연설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언급한 건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분명히 인권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위”라는 게 전부다. 또 미 주요 연구기관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선 사전 준비됐던 “과거사의 핵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있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보편적 인권”이란 부분을 읽지 않고 넘어갔다.

 당장 25일 밤 일본의 한 ‘한국 워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박 대통령이 이제 한·일 정상회담에 ‘응하기로’ 한 모양이죠? 결국 아베가 승리했네요.”

 일 언론 매체들도 마찬가지다. TV마다 ‘한국, 급거 입장 연화(軟化·부드러워짐)’란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장 11월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만날 것처럼 부산을 떨고 있다. 지하철 타블로이드 신문에선 ‘한국 굴복’이란 자극적 제목도 등장하고 있다.

 실제 청와대나 한국 외교 당국도 ‘한·일 정상회담’으로 흐르는 분위기다. 그동안 대일 강경론을 외쳤던 인사들이 돌연 “위안부 문제와 다른 (안보·경제·문화) 문제를 분리 대응하는 게 좋다”는 말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늘 한국에 대해 외쳤던 문구다. 한국 외교부도 변했다. 지쳐버린 여론도 이제는 ‘어떻게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일본의 아베 정권을 보자. 일 외무성이 26일 배포한 아베 총리의 유엔총회 연설문은 작심하고 일본 자랑으로 메웠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일본이 돈도 많이 내왔고 향후 여성인권 문제도 일본이 주도할 것이라고 했다. 위안부 문제 언급은 전혀 없었다. “20세기에는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여성의 명예와 존엄이 깊이 상처받는 역사가 있었다”며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하듯 표현한 부분이 있었을 뿐이다. 현장에서 보는 아베 총리는 이렇듯 눈곱만큼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다.

 따져보면 첫 단추를 잘못 끼웠었다. 애초에 “일단 만나서 따질 것 따진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다. 그런데 일본을 모르는, 아베를 모르는 인사들이 외교전문가를 자처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조치가 없으면 대일관계 개선도, 정상회담도 없다”고 못 박아 스스로 발목을 잡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 급후진 기어를 넣는 게 정답일까. 중·일이 APEC에서 만난다고, 미국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재촉한다고, 고립을 피해야 한다고 명분 없이 덥석 아베의 손을 잡으면 뭘 얻을 수 있을까. 저절로 우리의 대일 외교가 분리 대응되고, 아베가 위안부 문제에 ‘통 큰 선물’을 내놓을 거라 생각한다면 순진한 발상이다. 오히려 악수(惡手)에 가깝다.

대일 외교 현장에 오래 관여한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조바심 나고 풍파가 있더라도 따질 건 따져야 물러서는 게 일본”이라 말했다. 정상회담의 문은 열어놓되 분리 대응은 외교장관 선에서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 사이 한국은 명분(동북아 다자협의)과 외교 입지(지역 간 갈등 중재)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모색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쪽이 훨씬 현실적이다. 아무 대가 없이 달랑 한·일 정상회담에 응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다. 긴 호흡으로 깊이 생각할 때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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