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추모 시화집 한정판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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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나 죽어/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저 물 속에는/산 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이렇게 '나 없는 세상'이란 시만 남겨놓고 이성선 시인(사진)은 2001년 5월 4일 60세로 타계해 설악산의 가장 깊숙한 품 백담사 계곡으로 돌아갔다.

1970년 등단해 '산시''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등 13권의 시집을 펴내며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설악산과 그 언저리에 살며 그곳만을 죄없이 맑고 깊게 읊다 가 그 시들만이 지금도 독자들의 가슴을 맑게 울리고 있다.

이시인의 2주기를 맞아 그의 '산시(山詩)'명편들에 한국화가 김양수 화백이 수묵화 40여점을 그린 산시화집 '산'(시와시학사.4만9천원)이 출간됐다. 이와 함께 산시화전도 5월 4일까지 서울 관훈동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열리고 있다.

1백쪽 남짓의 단행본인데도 책 값이 이리 비싼 것은 1천5백부 한정판에 수묵화의 농담(濃淡)의 맛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고급 마분지를 썼기 때문. 고급스런 멋을 풍기는 이 책은 교보문고 강남점 오픈에 맞춰 '명품코너'에 전시, 판매될 예정이다. 책의 명품시대를 이 시집이 연 것이다.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듯이//동짓날 서산 위에/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꼬부려 누운//초승달//산이 한송이 꽃이구나//지금 세상 전체가/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화엄의 손이구나"('꽃 한 송이'전문)

설악산 봉우리들에 걸린 초승달이 마치 꽃같아 설악산 전체를, 온 세상을 꽃으로 보는 이 시인의 마음 자체가 꽃이다. 그런 시인의 마음들만 있다면 이 세상은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 화엄세상이 될 것이다.

이 시에 마음의 자유로운 붓질로 절제와 여백의 미를 그린다는 평을 듣는 김양수 화백은 그림을 보탰다. 꽃같이 예쁘고 청량한 세상을 그리기 위해 수묵에 파란 채색을 곁들였다.

맑고 기품이 있어 이시인의 시집을 항상 곁에 끼고 살았다는 김화백은 "내 붓질에 힘이 들어가 있어 여리면서도 모든 것 다 껴안는 이시인의 맑은 여백의 세계를 그리려 우선 붓질의 힘을 빼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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