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황후가 윷놀이로 슬픔달랬던|한글판 「여행도」를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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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무고로 쫓겨나 폐비(폐비)의 슬픔을 달래며 친정에서 소일할 당시 그녀가 직접 윷놀이판 형식을 빌어 작성한 한글판 『여행도』가 발견되어 한글날을 맞은 국어학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일근교수(건국대·국문학)는 8일 여자의 행실에 관한 사상(사상)과 여인명을 항목으로 하여 윷놀이판식으로 만든 인현왕후소작의 『규문수지여행지도』(규문수지여행지도)를 발굴하여 이를 공개했다. 이 『여행도』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남성용의 『종경도』(벼슬길)나 『승경도』(팔도경치)에 필적하면서도 중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현왕후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가로70㎝, 세로90㎝의 장방형에 1백19항목으로 짜인 이 『여행도』는 『내훈』 『여사서』의 정신과 내용을 골격으로 삼고 있는데, 등장인물이 모두 중국여인이지만, 조선조 명종때의 권신 윤원형의 첩 난정만이 유일하게 악녀의 우두머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당시 장희빈에 대한 인현왕후의 처지와 견주어 볼 때 흥미를 자아내는 일면이다.
『여행도』는 또한 모두 한글 표기를 위주로 하고있지만 간간이 한자표기도 곁들여 한글로 풀이해 놓음으로써 「세기의 국어 현상을 역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교수는 『이 여행도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1701년)의 작품』이라고 밝히고 그 시기는 『왕비가 장희빈에게 밀려서 폐비가 되어 친가에 나와 있다가 다시 복위되기까지 6년동안(1689∼1694년), 즉 숙종 15∼20년간』이며 이는 『자신의 수양과 소일거리외에 친정부녀자들을 가르치는데도 목적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다시 입궁할 때는 당부하기를 이 『여행도』를 벽에 붙여 『마치 나를 보듯하라』고 당부하였으며 그뒤 모든 자손부녀자들이 이것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여행도』의 중앙부에 한글로 남겨져 있는 문충공 민진속(1664∼1736년·왕후의 남제)의 기록에서 입증되고 있다.
즉, 『여행도는 인현왕후(인현왕후), 수 시도(수사시도), 교게아선 고조모 민시(교계아선 고조모민씨), 특이시도(특이시도) 춍헤약왈(총혜야왈) 슉여샹유(숙여상유) 노이좌우(노이좌우), 금낭상니(금낭상리), 부이시도(부이시도), 용체별후안면(용체별후안면) 노라. 신힉(신해)문충공신민진원(문충공 신 민진원), 호단암(호단암), 필운(필운)니라. 님 초하(임자초하)현숀모등츌(현손 모 등출)』(『여행도』는 인현왕후가 손수 만들어 나의 고조모 민씨를 가르치고 경계한바, 특별히 이 『여행도』를 소중히 여겨 이르기를, 숙녀가 항상 놀 때나 늙어서도 좌우에 두며 늘 주머니 속에 넣어둘만 하다.
이『여행도』를 붙여두고 내가 입궁한 뒤에 내 얼굴을 대하듯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신해년, 즉 1731년 영조7년에 문충공 민진원이 기록했다고 전한다. 임자년, 즉 1732년 영조8년 초여름 고손 모 옮겨적음) 이라고 한데서 확실히 설명되고 있다(민진원의 기록중 한자는 김교수가 추정하여 삽입한 것임).
따라서 현존 『여행도』를 옮겨 적은 사람은 불명이나 민씨가 외손중의 한 사람이며 옮겨 베낀 연대는 1732년(영조8년)으로 판명된다.
모두 1백19항목으로 구성되어있는 『여행도』에는 역사상의 악녀와 선녀들의 이름과 거기에 관련있는 행실이 적혀있다.
정6면체의 주사위를 던져 1∼6점의 구분에 의하여 진마(진마)하게 되어있는데 점수에는 각각 명칭이 붙어있다.
즉, 1점은  (사· 는 방죠하야 못쓰미니라=방종), 2점은 위(위·위는 거자일이요=거것), 3점은 재(재·재는 재조요=재주), 4점은 행(행·행은 행실이요=행실), 5점은 경(경·경은 마음이 젼일하미라=섬김), 6점은 셩(성·셩은 마음이 졍밀하미라=정성)이다. 최하에 즘생(금수)→김아(김아)→난정(난정)에서 시작하여 위로는 맹모(맹모)→경강(경강)→태임(태임)에까지 이르면 끝나게 된다. 태임칸에는 『녀편내중 셩인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중국 주나라문왕의 부인을 지칭한다.
각 칸의 위쪽에는 한자로 그 칸의 명칭이 적혀있고 바로 밑에 다시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그 명칭에 대한 설명이 있고 아래쪽에는 나온 점수에 따라 행마 지시가 적혀있다. 예를 들어 「난정」칸을 보면 오른쪽에 『윤원형에 처니 무상 사납더니라』라고 난정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쪽 중앙에는「난뎡」이라는 한글표기가 있고 그 좌우에,  (1점)일땐 즘슁으로, 위(2점)일땐 김아로, 경(5점)일 땐 왕남모(왕남모)로, 성(6점)일 땐 현념처 (현령문)로 진마하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여행도』는 그 연대와 작자가 확실한 까닭에 그 문헌적 가치로서 ①조선조 여성은 한글의 보모이며 수호자였음을 입증하며 「세기 국어현상의 생생한 자료이고 ②조선조 여성의 가치관의 집약이며 ③종경, 방경강와 더불어 사대부층 남녀의 전통오락 연구에 괄목할 자료이며 ④『여행도』가 지니는 인현왕후의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그녀에 관계되는 역사·문하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며 또한 ⑤전통교육상, 전통오락의 현대화에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김교수는 밝혔다.

<이근성기자>

<사료로도 귀중>
▲김용숙교수(숙명여대·궁중문학)의말=놀라운 일이다. 인영왕후는 스스로 죄인이라며 햇빛보기를 꺼려하고 추녀끝의 달도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않고 폐비의 6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성녀(성녀)로 알려진 왕후가 『여행도』에서, 여인의 행실을 가르쳤으나 놀이방법을 쓰고있는 것은 왕후의 새로운 면모인 인간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현왕후와 국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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