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베란다 열면 조롱박 준비|비좁다고 눈총 줬더니 어느새 주렁주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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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여보, 이리 좀 와 봐요』 베란다의 화초에 물을 주던 남편이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아침 준비에 바쁜 나를 부른다. 뭐 또 어디서 이상하게 생긴 들풀이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쯤 솎아 왔겠지 생각하며 대답만 던져 놓고는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새벽의 산을 즐겨 찾는 남편은 가끔『냄새가 좋아서』라 든 가, 『섬세한 생김새 때문에』라든가 하는 구실들을 높여 가며 동산 녘에 흔하게 널려있는 들풀들을 한 두 포기씩 뽑아다가 화분에 심어놓고는 나룰 불러대기도 하고, 조그마한 줄기 한둘을 따다가는 늦잠에 빠져있는 나의 코앞에 갖다 대어주기도 한다.
『글세, 잠깐만 나와 보라니까』서두르는 폼이 뭔가 심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대강 아침 준비를 끝내고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연탄을 쌓고 장독만 늘어 놓으려해도 벅찰, 좁아 터진 베란다에는 그나마 남편이 주섬주섬 심어놓은 이름 모를 들풀들로 해서 두 사람이 비켜서기도 어렵다.
게다가 지난 봄 큰 보물단지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안고 들어 온 박과·유자·화초호박들의 모종으로 해서 들여놓아진 두개의 커다란 사과궤짝은, 간장·고추장을 한번씩 뜨러 나가려해도 그렇고, 빨래 한 가지를 널려 해도 거추장스럽게 가로 걸리고, 또 청소를 해 놓아둬 궤짝 틈새로 흘러나오는 흙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놈의 궤짝 훌쩍 들어서 저 아래로 던져 버렸음.』 이제는 제법 베란다의 난간을 짙푸른 잎으로 채워가며 하얗고 노란 꽃을 피어 가는 그것들을 신기한 듯 들여다 호는 남편에게 몇 번씩이나 투덜거렸었다.
『대체 무얼 갖고 그래요?』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내게 남편이 박잎 하나를 젖혀 보였다.
『세상에!』그 동안 그렇게 나를 짜증나게 했던 호박 덩굴의 까술하고 커다란 잎새 뒤에는 목탁모양으로 생긴 연둣빛의 매끄럽고 예쁜 조롱박 세 개가 어느 틈에 아기 주먹만하게 자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구박만 받고 큰자식이 더 건강하다던 가, 흙 냄새도 맡기 어려운 4층 꼭대기에서 발길에 챌 때마다 쏟아지는 나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왕성하게 뻗어나가는 멋없는 잎새들이 숫제 밉살스럽기까지 하더니 어느 틈에 저런 결실들을 맺어놓았는가, 눈 여겨 덩굴 속을 뒤져보니 야구공 만한 주홍빛의 화초호박도 숨어 있고 그 박이며 호박의 덩굴들을 의지하고 뻗어나간 유자의 가느다란 덩굴 이도 꽤 많은 열매들이 맺혀져 있었다.
단단한 무쇠 난간을 의지하고 가는 줄기에 매달린 어린것들이 불안스럽기도 하고 그 동안 구박만 주어왔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조금쯤 풀어 버릴 겸 오늘은 틈을 내어 안전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그 작고 귀여운 열매들을 받쳐 주어야겠다.
이광자 <서울구노구독산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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