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정치의 사법화' 넘어 '사법의 정치화'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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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가 깨졌다.”

 김동진(45·사법연수원 25기)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가 지난 12일 법원 내부전산망 ‘코트넷’을 통해 국정원 댓글 사건 1심 판결을 정면 비판하는 것에 대한 판사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그간 불문율처럼 여겨졌던 ‘다른 재판부 판결 언급 자제’ 원칙이 무너지자 법관 사회는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더욱이 김 부장판사가 코트넷 자유게시판, 형사법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글의 성격과 거리가 먼 지적재산권 커뮤니티에도 같은 글을 게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1년 넘게 40여 차례의 공판기일을 진행한 뒤 사건기록을 전부 읽고 고뇌해서 내린 결론을 다른 법관이 판결문 한번 읽어보고 궤변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판사라 해도 제3자가 알 수 있는 내용은 판결문과 언론 보도뿐인데 술자리에서나 할 수 있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한 셈”이라는 것이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며 “그렇다고 고법 부장 승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심각한 명예훼손이자 인권유린”이라고 말했다. 한 판사는 “법원 내부에서 김 부장판사에게 우호적인 시각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법조계에서는 김 부장판사의 ‘공개비판’을 두고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정치권에서 갈등을 자체적으로 해결 못하다 보니 그 판단을 법원에 미루게 됐고, 그 결과 법원까지 정치에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의 사법화’를 넘어 ‘사법의 정치화’ 단계로 나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사법부는 주요 정치적 이슈들이 법원으로 밀려들면서 ‘해결사’ 역할을 떠맡았지만 정치적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부터 행정수도 특별법 위헌소원, 지난해 ‘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사건, 국정원 댓글 사건까지 헌법재판소 결정, 법원 판결이 나올 때마다 “정치적 판결” “양심적 판결”로 반응이 갈렸다. 이은영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선출직인 국회의원들이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타협하는 게 원칙”이라며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는 사법부 판단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법의 정치화 우려를 불식시킬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판사 출신의 로펌 변호사는 “정치권의 노력과 함께 법원 스스로도 판사의 정치적 중립성과 판결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했다. 김종철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사법부의 정치화는 중립적 판단을 해야 할 사법부의 신뢰를 저하시킬 것”이라며 “불필요한 논쟁의 중심으로 사법부를 끌어들여 갈등 해결을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다”고 제시했다.

박민제·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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