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한미외교요람기(8)|한표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조A,B항에 대한 미국무성의 유권해석을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몹시 언짢게 생각했다. 제1차 한일회담은 청구권문제로 의견이 엇갈려 52년4월21일 결렬되고 말았다.
이 대통령은 즉각 나에게 훈령을 보내왔다. 재산청구권은 한국만이 일본에 대해 주장할 수 있고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과 단서가 붙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는 구술서 ( Note Verbal)를 작성해 국무성에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박동진 1등 서기관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구술서를 작성해 국무성에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의 구술서에 대해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았다.
그후 8개월이 지나도록 회담이 재개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53년1윌5일 이태통령을 동경에 초청,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대통령과 「요시다」 (길전) 수상간의 회담을 주선하고 인접국간 평화와 선린우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요시다」수상이『한국에 호랑이가 있읍니까』 고 묻자 이대통령이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가 다 잡아 한 마리도 없다』 고 대답하는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요시다」수상은 한일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예비회담을 열고 서울에 일본대표부를 설치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태통령은 모두 거절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대통령의 방일이 개기가 되어 53년4월15일 제2차 회담이 동경에서 열렸다. 일본측은 수석대표를 경질, 「마쓰모도」(송본)대신에 「구보다」 (구보전관일랑) 외무성참여(차관)를 내보냈다.
우리 대표단은△수석 김용식 주일공사△대표 임송본· 장기영· 장경근·홍진기·유태하· 최규하씨 등이었다.
회담은 1차와 마찬가지로 진전이 없었다. 청구권문제, 평화선 및 어업문제에 관한 입씨름이 여전히 논쟁의 핵이었다. 회담은 3개월 이상 지속되다가 휴회하고 말았다.
그해 10월6일부터 열린 3차 회담에서는 양유찬 대사가 다시 수석대표로 오고 김용식씨가 교체수석대표를 맡았다.
소위 「구보다」 망언은 이 회담에서 나왔다. 회담이 열린지 10일만에 10월16일 제2회 재산 및 청구권위원회에서「구보다」대표는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①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 전에 한국이 독립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②종전 후 한국에서 일본인을 축출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③재한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법령 제33호로써 처리한 것도 국제법위반이다. ④한국민족의 노예화란 표현을 담은 카이로· 포츠담선언은 전쟁에 시달린 연합국 사람들의 소위 히스테리의 소산이다. ⑥일본의 36년간에 걸친 한국통치는 한민족에게 유익했다.
특히 그의 발언 중 ⓛ②③항은 2차대전의 종결방식인 무조건 항복과 식민지의 해방이라는 전혀 새로운 현상을 그 이전에 현존했던 군사점령에 관한 헤이그 육전 법규의 틀에 수용, 해석하려는 시대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이 발언을 들은 한국대표들은 모두 아연 질색했다. 김용식 대표는 강경한 자세로 이 발언의 취소를 요구했다. 두 사람의 공방은 이러했다.
△김=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면서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귀하는 아직도 믿고 있는가.
△구보다=그 말은 귀 측에서 일본의 한국통치의 마이너스 측면만 말했으므로 플러스 된 점도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금=그러면 이 발언은 공적인 발언인가.
△구보다=물론 개인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며 공적인 자격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훈령에 의한 것은 아니다.
△금=다음 2개항을 요청한다. 만일 이 요청이 일본측에 의하여 수락되지 않을 때는 우리측 대표단은 이 회의에 계속 참석할 수 없다.
①귀 측 대표가 발언한 문체의 5개항을 철회할 것. ②귀 측은 이 발언이 과오였다고 공식으로 언명할 것.
△구보다"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외교회의에서 일국의 대표가 발언한 것을 철회했다는 예를 들은 일이 없다. 본인의 발언이 과오였다고 생각지 않으므로 발언을 취소할 생각은 전혀 없다. 만약 귀 측이 회의를 진행 못한다면 유감 된 일이나 회의는 결렬되는 것이며 이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