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전기배틀|명주의 본고장|상주군 이안면 흑암리|뽕·누에에 날씨 알맞아 고려 때부터 명산지|113가구서 직기 모두 2백대 보유|한대에 연120만원 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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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의 첫머리 자를 따서 이름 붙었다할 만큼 이 지역 최대의 고을이었다.
그 중에서도 상주는 예로부터 쌀·고치·목화가 유명해 『삼백 고장』이라 했으니 고치는 오늘에「상주명주」란 전통명물을 남기게되었다.
주산지는 함창·이안·공?·외면 등 4개면. 그러나 하나 둘씩 사양길에 문을 닫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안면 흑암리에서 만 명주 베틀 소리가 울리고있다.'
상주군청에서 위창읍 쪽으로17㎞, 국도를 따라가다 왼쪽으로 꺾어 농로로 접어들면 나지막한 기와집들이 조는듯 눈에 들어온다.
담장 안 나뭇가지에는 명주의 본고장답게 여인의 속살 같은 희고 부드러운 명주 필이 하늘하늘 흩날린다.
그러나 이앗대를 움직이고 바디집 을 끌어당겨 한 올 한 올 명주를 엮던 댕기 땋은 처녀의 고운 자태는 보이질 않는다.
『장장춘일(장장춘일)봄일기에/명주분수 짜내어서/은장두는 칼로/으로 슬픈 끊어내어…』하던 한 어린 여인네의 베틀 노래도 들리질 않는다.
모두가 근대화 물결에 밀려「궁더러쿵」하던 베틀 대신 모터직기가「철컥철컥」쇠 소리를 내고있다.
『그나마 우리 마을이 지금껏 명주를 짜는 건 양반 마을의 고집스런 관습 때문 아닌감. 뼈대있는 양반에 아낙이 어데 논밭에 나가 일을 해. 짐에서 길쌈이나 하면 족한 기라.』
1백 13 가구 중 90%가 문열공이조년 선생의 후손인 성주 이씨들. 해방 후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이 실속 없고 힘든 명주 짜기를 집어치우고 공장 일을 찾아 나섰지만 이 동네만은 엄하게도 명주 짜기만을 고집했다.
명주가 나일론 등 화학사에 밀리고 까다로운 뒷손질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사라졌지만 부녀자들에게 별다른 부업을 허용하지 않는 별난 전통덕분에 명주의 명맥이 유지되는 지도 모른다.
이 지방이 명주의 본고장이 된 것은 고려 때부터. 토양과 기후조건이 뽕나무와 누에치기에 알맞아 명주산지로 유명해졌다.「통영갓」「나주배」식으로 이곳에서 짠 명주는「함창명주」라는 이름으로 궁중진상은 물론 양반네들의 선분표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상주군 이안면이지만 일제당시 함창군수하면·함창면 조천리·이안면 여물리등지에는 공동작업장까지 설치 돼 전국 명주시장을 석권했었다.
지금도 상주에는 옛 영화를 말하듯 전국에서 유일하게 농장(농장)대학이 있으며 은척면 두곡리에는 높이 모두의 3백년 된 뽕나무가 남아있다.
이 마을의 직기는 모두 2백대. 가구마다 1∼2대씩 마루·헛간·안방 등 아무 데나 갖춰놓고 있다.
제사공장에 공동으로 B급 옥사 (왕사) 절관을 구입, 연간 폭12인치 짜리 명주 4백 구비(1구비 80자)룰 짠다.
이 명주는 2m쯤 떨어진 함창읍에서 5일마다 열리는 전국 유일 의 명주 장에 내다 판다. 직기1대에 평균 순소득은 1백20만원. 하루5∼6시간 짤 때 얘기고 그 이상일 때는 그만큼 수입도 는다. 부녀자들이 소일거리로 한 달에 10여 만원씩 버는 괜찮은 부업이다.
이원현씨(44)는『대당 15만원인 직기 4대만 갖추면 논 30마지기 소출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백13가구 중 47가구가 전화를 갖고있다.
집집마다 대부분 오토바이가 있어 장날이면 명주를 뒤에 싣고 장터로 나간다. 물론 남자들이 내다 판다. 안팎일은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명주 판돈으로 10년전 부터 매년 9천평씩 타 부락에서 논을 사들여 상주에서는 최고 부촌소리를 듣고있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명주는 옛날과 달리 거의 수의(수의)용으로 팔리고있다.
『누에고치는 전량 수매한다』는 당국의 방침에 따라 누에고치에서 직접 좋은 실을 못 뽑고 각 제사 공장의 수출 불량품으로 시중에 파는 B급 실을 사서 쓰기 때문이다.
『명주옷을 해 입는 사람도 요즘 별로 없기 때문에 수의용으로만 주로 짜능기라. 그래도 없어서 못 팔지.』도루 마리를 갈아 끼우는 임방희씨 (47·여) 는 컬러TV를 살 꿈에 부풀어 밤늦도록 기계를 돌린다고 했다. 『수의는 명주로 만들되 윤달에 지으면 좋다』는 우리네 풍속에 따라 윤달에는 밤을 새워 명주를 짜도 없어서 못 판다고 한다.
집에서 옷을 해 입거나, 완고한 습속에 따라 아녀자들이 짐에서 조금씩 짜던 명주마을이 가내수공업마을로 이처럼 변모한 것은 전기가 들어온 72년부터.
베틀에서 수직기로, 다시 족답기(족답기)로 조금씩 발전했으나 모두가 사람이 직접 붙어 앉아 손발을 움직여 명주를 짤 수 있었기에 수익성이 없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고 모터가 달린 자동화된 직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빨래 등 집안 일을 하다가 시간을 맞춰 실만 갈아주면 저걸로 명주가 짜지기 때문이다.
고집스런 양반네의 전통이 결국 이 마을에 부를 가져다 준 셈이다.
【상주-이석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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