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속에 뿌리내린 자유노조|인구 2만의 폴란드소읍을 통해본 창설 한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9월은 공산권 최초의 자유노조인 폴란드의 솔리대리티가 창설 한돌을 맞는 달이다. 80년8월31일 폴란드 정부가 그다니스크협정에서 일련의 사회개혁과 함께 공산당에서 독립된 노조의 결성을 허용하자 9월17일 창립모임을 가진 솔리대리티는 이후 1년 동안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폴란드 혁명을 이끌어 왔다. 최근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분지는 폴란드의 한 작은 마을을 표본으로 잡아 솔리대리티의 형성과 영향을 분석했다. 바르샤바남쪽 2O㎞, 농업과 공장노동으로 먹고사는 인구2만명의 피아세치노읍은 지난해 8월말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양순한 수도권 위성도시였다. 다른 여러 곳에서 이미 7월부터 산발적으로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곳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8월31일의 그다니스크 협정은 읍내의 분위기를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공장들에서 처음 쏟아져 나온 물결은 순식간에 주민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었고 1년이 지난 지금 그 파고는 「바웬사」등 자유노조의 지도자들이 잡았던 목표를 훨씬 넘어섰다. 바르샤바 등 중앙무대에서는 노조본부와 정부의 대표들이 여러 부문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지만 피아세치노 등 전국의 「현장」 에선 승부는 이미 가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피아세치노에선 중앙무대에서처럼 노조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공산당원이나 관료는 찾아볼 수 없다. 공장들에선 솔리대리티회원들이 간부임명과 경영문제에 관해 사실상의 거부권을 갖고 있다. 「바웬사」가 따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율관리개념이 벌써 도입된 셈이다. 읍행정위원회에도, 식량난과 주택난을 다루는 각종공식조직에도 솔리대리티가 참여한다. 관영매체와는 전혀 다른 보도를 하는 자체신문도 있다. 피아세치노에서 제일 처음 자유노조가 만들어진 곳은 컬러TV의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읍내에서 가장 큰 폴콜로공장이었다. 그다니스크협정 이튿날인 80년9월1일 공장의 당 제1서기는 자유노조지부의 조직여부를 의논하기 위해 공장 안의 관영노조원·간부·당원 등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제1서기는 강경한 말투로 『자유노조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연설했다. 물론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침이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잠시후 한 젊은 당원이 공개토론을 요구하고 나섰다. 도전이었다. 뒤이어 한 두사람이 더 동조했다. 제1서기는 이들을 묵살하고 곧 회의를 중지했다. 그러나 이 젊은 당원은 노조조직을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 불과 1주일만에 5천3백명 공원중 1천5백명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 동안 임금인상을 내건 가벼운 파업도 있었다. 공장측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회원수는 이후 1년만에 5천3백명으로 늘었다. 폴콜로공장을 시작으로 읍내 모든 공장과 업체에서 노조가 조직됐다. 이들 중에서 뽑힌 대표14명이 지부집행위를 구성하고 변두리의 강가건물에 사무실을 차렸다. 바르샤바의 지구본부에서 오는 소식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텔렉스기도 들여놓았다. 이 사무실은 노조원은 물론 주민 누구나의 집회장소이기도 하다. 주부·노동자·의사 등 전문직업언·학생 누구나 들러 노조신문을 받아가거나 식량문제 등 불만과 돌아가는 얘기들을 나눈다. 폴콜로공장의 노동자들이 드는 자유노조가입 이유 중 가장 많은 것은 당의 꼭두각시인 관영노조에 대한 실망이다. 공장경영의 부실도 자극제가 됐다. 폴콜로공장은 「기에레크」정권의 무모했던 경제계획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미국 RCA 및 코닝글래스사와 기술계약을 맺고 70년대 중반부터 건설되고 있는 이 공장은 원래 79년에 완공, 81년에 60만대의 컬러 브라운관을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만성적인 기자재와 부품 부족때문에 건설공사도 아직 끝나지 않고 생산량은 지난해엔 3만대, 올해에도 기껏 5만대정도 일것 같다. 이 때문에 5천명의 노동자중 4천명은 항상 손을 놓고있는 상태다. 노동자들이 경영개혁을 부르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어느 정도 세력을 굳힌 솔리대리티 폴콜로공장지부는 노동자와 경제 전문가들로 기업전단위원회를 구성,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아직은 필요 없는 컬러TV공장을 커다랗게 세운 것부터가 잘못이며 ▲그나마 제대로 관리하려면 경영 정책결정의 중앙통제를 풀어 자율화하고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폴콜로공장의 솔리대리티는 임금문제에도 발언권이 크다. 이들은 또 신규채용 등 인사에 관한 거부권도 갖고 있다. 공장 각 부서별로 노사위원회가 있어 근로조건을 살피고 매주 한번씩 노조대표가 경영진과 만나 공장의 현황을 논의한다. 슬리대리티운동으로 달라진 것 중엔 당료 및 고급관료의 호화별장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노조가 생긴 후 별장지대는 겁이 없어진 주민들의 산보터가 돼 버렸다.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이들 공산귀족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즉석 「관광단」을 짜기도 했다. 이쯤 되자 대부분의 별장주인들은 주말휴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솔리대리티는 이 별장들을 탁아소등으로 이용하기 위한 교섭도 벌이고있다. 피아세치노읍의 이 모든 변화는 폴란드 곳곳에서 거의 비슷하게 되풀이되고있다.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