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의미』|김병익 (문학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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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학 3학년 때 가을이었던가, 양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다 내용은 물론 저자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 채 제목에 끌려 산 것이 「칼·리비트」의 『역사의 의미』란 책이었다. 영어판으로, 서문에 이어 콩트며 「마르크스」「비코」로부터 유대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역사관을 밝히는 장명으로 목차가 나열돼 있어 이것저것 입문적 지식에 호기심이 차있던 나를 유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작 읽기 시작한 것은 그해 겨울 방학 때였고, 읽기 시작한 것으로 끝났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서론>만 보고 책을 덮었으며, 그후 그 책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다시 펼쳐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그 나이 또래가 흔히 그랬듯 교회 다니기를 멈췄고 내 나름의 내적 방황과 회의에 주눅들 정도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실존주의에 깊이 매혹 당하고 있었다.
세상은 어둠이었고, 혼란이었으며, 인간은 무의미했고, 역사란 안개 속이었다. 그래서 「카뮈」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졌으며 『어린 왕자』를 사랑했으며 그럼에도 가치와 질서를 부여할 아무런 줄기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리비트」의 『역사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의 서론을 통해서 나는 「세계」가 헬라에서는 공간적으로 이해되고 히브리에서는 시간적으로 인식된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역사가 반복이 가능한 공간으로, 그러니까 사계처럼 생성하고 번영하다 쇠락하여 멸망한다는 자연 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히브리의 세계에서는 역사가 1회적인 것이며 구원을 향한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파악되고 그 구원의 순간이 종말로 규정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종말론! 그때 섬광처럼 나를 뒤흔든 이 단어는 인간과 역사와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 되었다. 신학에서 뭐라고 규정하든, 그 말은 내가 신비에 쌓인 이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지렛대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많은 말씀들과 모세의 십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흔한 도덕률의 구원적 의미까지 이 말을 통해 의식했으며 삶의 방법과 이웃과의 사랑의 진의를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 책은 서론 이상 더 읽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의 20대와 30대, 그리고 정열이 묽어져버린 이제까지 이 책이 내 속에 지탱되고 있는 것은 처음 몇십 페이지만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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