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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첫 매장, 해외 품평회서 수상 … 술술~ 풀리는 우리 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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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경기도 파주·화성·용인·의왕등에서 만들어지는 민속주. 탁주부터 알코올 도수가 40도에 이르는 소주까지 다양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휴대전화로 계좌번호 찍어 드릴게요. 네네. 배송한 다음에요. 감사합니다~.”

 “예, 사장님. 지금 물건 출발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3일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소규모 양조장. 주택을 개조해 전통주를 만드는 이곳에서 추석 대목을 맞아 작업이 한창이다. 바닥에는 술을 담는 종이 포장지가 널려 있고, 주문 전화는 쉴 새 없이 걸려왔다. 13년간 개발해온 전통주를 지난해 시장에 내놓은 이석준(63) 대표는 “이번 추석 대목에만 1200병이 판매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전직 은행원이다. 해외 출장을 가면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 술을 소개하고 싶은데 면세점에도 우리 술을 팔지 않는 현실이 답답했다. 그래서 전통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가 지난해 내놓은 ‘천비향’은 술을 세 번 빚는 전통 기법인 삼양주(三釀酒)를 접목해 만들었다. 햅쌀로 만든 달달한 맛이 입가에 맴돌며 여운이 느껴지는 술이다. 가격은 한 병에 1만5000원. 이 대표는 “값싸게 시중에 나오는 소주와 막걸리는 우리 술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며 “제값을 제대로 받는 전통주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날 경기도 용인시 상가 건물에는 주부와 건설업자, 디자이너 출신의 양조장 운영자 네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들은 올해 1월 출시한 증류식 소주 ‘미르’ 판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사무실 칠판에는 블로그 운영부터 공장 건설 일정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주부였던 정경순(51) 이사는 “노후 대책을 알아보기 위해 발효 식품을 공부하던 중 전통주 매력에 빠져 사업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3~4년 전부터 같이 서울 방배동에서 전통주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됐다. 지난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뜻이 맞는 수강생 5명과 함께 한 명당 2000만원가량씩 자본금을 모아 회사를 창립했다. 신인건(51) 대표는 “전통주가 품질은 뛰어난 반면 국내 주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3%도 안 돼 발전 가능성이 높다”며 “누룩을 직접 빚는 전통 기법을 되살려 명인을 뛰어넘는 술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주춤했던 전통주 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2008년 일본으로 막걸리 수출이 늘면서 반짝 특수를 누리다 가파른 하락세를 겪었던 전통주 업계는 최근 이처럼 소규모로 다양한 종류를 생산하고 고급화하는 전략을 내세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국내 한 대형 백화점은 올해부터 전통주 전용매장을 만들어 전통술 17가지 판매를 시작했다. 백화점 안에 전통주 매장이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통술을 납품하는 소규모 제조업자들을 위해 정부는 와인 병 모양의 술 포장을, 백화점은 로고와 박스 디자인을 지원했다. 한국전통주진흥협회 주봉석 사무국장은 “전통주는 해외에서도 경쟁력 있는 술이지만 마케팅 역량이 부족해 이익을 내기 힘든 구조”라며 “제조업자와 유통업자, 정부가 힘을 합쳐 해외 판로 개척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주류 품평회 수상 소식도 줄을 잇는다. 세계 3대 주류 품평회라 불리는 몽드 셀렉션 등에서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유자생막걸리, 미나리생막걸리와 같은 전통주 9개 품목이 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젊은 층의 관심이 뜨겁다. 서울 이태원과 마포 일대 전통주만 취급하는 주점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방을 직접 돌며 전통주를 연구하는 20, 30대도 늘고 있다. 이들은 음식점을 차리거나 유통에 참여하기도 한다. 와인 마케팅을 담당하다 전통주 연구에 빠져든 이지민(34)씨는 “이탈리아와 칠레의 와이너리에 가면 규모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반면 국내 전통주 양조장은 역사가 깊으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통주 판매가 저조해 전통 기술을 가진 명인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선의 3대 명주로 알려진 ‘감홍로(甘紅露)’를 빚는 경기도 파주의 양조장은 2008년 이후 술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이민형 대표는 “평양에서 술을 빚던 장인어른이 밀주를 만들어서까지 어렵게 명맥을 이었지만 판매가 워낙 안 돼 현재는 숙성된 것만 포장해 판매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전통주는 맥이 끊겼다. 주세법 등이 적용되면서 양조장 외에는 술을 담글 수 없도록 강제한 탓이다. 해방 후에도 유사한 주세 정책이 이어지면서 전통주는 살아나지 못했다. 국세청 단속을 요령껏 피하면서 차례를 지내기 위해 남몰래 술을 빚던 이들 덕분에 그나마 명맥을 이어갔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나서야 전통술을 복원하고 판매가 허용됐다.

 약 80년간 맥이 끊겼던 전통주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성급하게 성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인삼과 찹쌀로 빚은 전통 약주를 개발한 최행숙(59) 대표는 “제품 개발과 유통망 확충에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며 “전통주 산업도 100년을 내다보고 꾸준히 키워야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제품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민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조선 3대 명주 감홍로·이강고·죽력고

‘막걸리, 동동주, 소주’.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술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집집마다 꽃이나 열매, 약초로 다양한 술을 빚는 풍속이 있었다. 문헌에 나오는 술의 종류만 600종이 넘고, 오늘날 재현된 술의 종류만 370여 종에 달한다.

 전통주는 크게 탁주·약주·증류주·과실주로 분류할 수 있다. 탁주는 막걸리를, 약주는 소국주(小麴酒)를, 증류주는 소주를, 과실주는 복분자주를 떠올리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평양에서는 석회질이 섞인 대동강 물에 용안육·지초·감초·정향 등 8가지 약초를 섞어 감홍로(甘紅露)를 만들었다. 한 잔 입에 대면 목 끝이 시원한 느낌이 들다가 술기운이 퍼지면서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전주 이강고(梨薑膏), 전라도 죽력고(竹瀝膏)와 함께 조선 3대 명주(名酒)로 꼽혔다. 알코올 도수가 40도 정도로 높다. 서울 이태원의 ‘심야식당’ 권주성 셰프는 “서양 위스키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데다 가격이 저렴하고 술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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