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동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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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무잎사귀만 걸치고 살던 인류의 조상들은 잡혼·군혼을 예사로 알았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의 아득한 할아버님네들만은 그런 혼인을 했었다는 기록이 아직 없다.
다만 첩을 두는 것은 지그시 눈감아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왕족들끼리는 혈족혼·인척혼을 꺼리지 않았다. 신라·고려시대의 왕족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이른바 「계급적내혼」이 그것이다.
부여·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와 함께 살았다. 레비라(levirat)혼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혼속이 엄격해진 것은 유교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고려말에 이르려 외가사촌, 이성재종자매의 혼인이 금지되고, 조선왕조는 뎌욱 엄격한 제도를 세웠다. 동성동본의 금혼은 물론 모계와 처족과의 혼인도 법으로 금했다. 배우자사이의 계급적 제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연애결혼은 흔히 갑오경장(1894년)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설마 한국인의 심정이랄까, 심안이 그렇게 어두웠을 것같지는 않다.
중국의 옛사료엔 벌써 고구려와 거루(읍루)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의 연애풍경을 볼수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성동본 혼인문제도 결국 인간의 상정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들의 혼인을 금한것은 원래 중국의 주시대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1천년도 넘는 때의 얘기다.
한대에 이르러 그 제도는 더욱 엄격해지고, 명나라는 대명률로 명시하기도 했다.
정작 오늘의 중국인(대만)들은 팔촌이내의 경우만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 뒤늦게 조선왕조때 이 제도를 수입한 우리만이 아직도 공연한 고집을 부리는 것같다.
서양과 우리와는 물론 풍습과 전통이 다르지만, 프랑스·스위스는 삼촌이내만, 독일은 형제자매사이의 근친혼만을 금하고 있을 뿐이다.
하긴 이웃, 일본도 삼촌이내만 금혼을 적용하고 있다. 「사또」(좌등영작) 전수상의 부인이 사촌인 것은 유명한 얘기다.
요즘 정부는 동성동본의 금혼을 팔촌까지만 적용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팔촌이면 고조 같고, 증조가 다른 형제. 고조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고, 증조는 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것을 생각하면 팔촌사이의 거리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동성동목의금혼을 우생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독일사람이나 일본사람이 그 때문에 우둔하다는 얘기는 별로 없다.
결국 판단의 기준은 우리의 도덕관념에 호소할수 밖에 없다. 도덕이라는 말이 막연하면 「부끄러움」을 느낄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말로 대신해도 좋다. 부끄러움이란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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