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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씨 45도의 열사 속 파리 떼와 싸운 1년|신다바드 1호 냉동사 서차흥씨 폴리사리오 억류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 선원들의 억류생활은 길고도 지루한 나날이었다. 다음은 신다바드1호 냉동사 서차흥씨(32·경남 충무시 인평2동 1168)가 본사 주원상 특파원을 통해 보내온 억류1년 수기이다.
언젠가는 이 메마른 사막에도 비가 내릴 날이 있을 테지. 어떻게든 살아서 조국에 다시 돌아가 그리운 가족들과 새로 태어난 아기를 봐야한다.
1년간의 억류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내게 다시 삶의 용기를 준 것은 집에서 온 편지 1장이었다.
처가 아들을 낳았다는 편지를 쓴 것은 작년 10월이지만 내가 받아본 것은 지난 5월이었다. 육신을 통째로 삶아 버릴 것처럼 열을 뿜는 사막의 모래 위에서 나는 그 편지를 열 번도 더 읽으며 반드시 살아 돌아갈 것을 다짐하곤 했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지난 1년이다. 처의 얼굴과 보지 못한 아들의 얼굴들이 서로 엇갈려 떠올랐다.
아들이라고 했는데 누구를 닮았을까, 혼자 궁리도 많았다.
해산한지 사흘만에 쓴 편지여서 아직 이름도 짓지 않고 출생신고도 못했다고 했다. 아들놈의 이름은 내가 돌아가 지어야지.
내가 신다바드1호의 냉동사로 채용돼 라스팔마스로 가기 위해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것은 80년 4월29일.
나는 전에도 1년간 참치 배를 탔었다. 신통치 않아 79년 귀국해 집에서 쉬었으나 다시 배를 타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부모님은 큰 형님이 모시고 있어 처는 큰 형님 집에 가 있게 했다.
거센 파도와 싸우며 바다에서 지내기 넉 달, 작년 8월24일 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악몽이었다.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지금은 너무 감격해서 머리가 정돈되지 않아 만리장성 같은 지난 일들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 날밤의 기억은 활동사진 같다.
밤1l시30분쯤 갑자기 양망 벨(그물을 올리는 벨)이 울려 긴장했다. 탈판(판을 걷는 것) 후 아직 1시간이 안 된 것 같은데 벨이 울려 모두들 그물이 배 밑에 걸렸나 생각했다.
선창에 있던 몇 몇 동료선원들이 갑판 위로 올라갔으나 소식이 없었고 우리는 그대로 배 밑에 갇힌 채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배가 쾅하고 무엇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나고 갑판뚜껑이 열렸으며 총을 든 몇 사람인가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한사람씩 배 위에 끌려 올라갔다.
밖을 보니 배는 모래톱에 닿아 있었다. 쾅 소리는 배가 모래톱에 닿을 때 나는 소리였다. 앞서 나온 사람, 뒤에 나온 사람, 모두가 갑판 위에 꿇어 앉혀졌다.
6명의 폴리사리오들은 소총과 폭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고무보트 몇 척이 배로 다가와 우리를 태우고 지점을 알 수 없는 해안으로 갔다.
사막의 해안엔 포대가 있었고 포들이 바다를 겨냥하고 있었다.
새벽의 해안 가에서 우리는 그들이 피워준 불로 온통 물에 젖은 옷을 말렸으며 해가 뜨자 다시 여러 대의 지프에 분승, 사막 길을 끌려갔다.
20분쯤 후 우리는 차에서 내렸고 하루종일 모래바닥에서 뜨거운 햇볕과 싸워야했다. 그 동안 모로코공군기 몇 대가 우리 머리 위를 저공비행 했으나 곧 사라졌다.
그 날밤을 모래 위에서 자고 다시 지프를 탄 채 6일 동안 낮에는 쉬고 밤에는 달려 어딘 가로 자꾸자꾸 끌려갔다.
6일 후 한 떼의 폴리사리오 수송부대와 만난 우리일행은 이들에게 인계되고 우리를 호송했던 폴리사리오들은 되돌아갔다.
우리는 수송부대의 차를 타고 한 부대의 임시막사에서 1주일을 지냈다. 그리고 다시 어디론가 옮겨져 천막을 배급받았고 여기서부터 짧고도 긴 1년간의 억류생활이 시작됐다.
천막은 보통 군 소대용 천막으로 천막 하나에 18∼20명이 수용됐다. 후에 다른 곳에 억류돼 있다가 우리와 합류한 캡주비(CAPJUBY) 2호 선원11명은 천막이 없어 땅굴에서 지냈다.
땅굴은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위에 철판을 얹은 다음 다시 모래로 덮은 것으로 길이 6m,너비2·5m, 높이1·6m 크기로 4∼5명이 수용됐다.
천막이나 땅굴 속에서 우리는 매트리스와 담요를 배급받아 지냈다.
우리를 감시하는 폴리사리오들은 통상 10∼20명으로 자주 바뀌었고 억류 초기에는 화장실 출입까지 엄격히 통제하고 감시했으나 얼마 후 우리행동에 자유가 주어졌다.
폴리사리오들은 일체의 외부소식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부식이 신통치 앓아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비교적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것도 같다. 우리는 하루에 47명분의 주식으로 중공산 쌀 25㎏과 부식으로 돌소금·콩 통조림·감자 등이 배급됐다. 그러나 콩 통조림은 18명에 1통, 감자는 5일만에 몇 개 정도여서 이름뿐이었다.
79년 동방53호 피격 때 홀로 폴리사리오에 피납 돼 따로 억류 됐던 박황영씨가 석방 며칠 전 우리와 합류할 때까지 우리일행은 17명이었다.
중공산 쌀은 품질이 나빴고 처음에는 양도 충분치 않았으나 얼마 뒤부터는 쌀만은 충분히 배급받았다.
조그만 농장이 있었는데 폴리사리오들이 토마토·파·양파·고추를 재배해 먹었으나 우리에게는 주지 않았다. 파를 볼 때마다 김치생각이나 꼭 김치를 다시 먹어보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 폴리사리오들은 우리에게도 파를 조금 나누어주었다. 폴리사리오들의 식사도 빵 몇 조각정도여서 우리보다 썩 나은 것은 아니었다.
억류 중 우리는 강제노동을 한 적은 없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고 가만있도록 만 했다.
섭씨45도의 무더위 속에서 우리는 그날그날 혹서와 파리 떼에 시달리며 무료한 생활을 한동안 계속했다. 한참 후에는 나무 조각이나 마분지 등을 오려 장기·바둑·화투를 만들어 유일한 오락으로 즐겼지만 그전까지는 잠을 자거나 집 생각을 하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의복은 배에서 입던 것이 다 떨어졌으나 새로 지급되지 않아 나중에는 팬츠만 입고 지냈다. 날씨가 더워 팬츠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은 어쩌면 다행인 것 같았다. 입고있던 팬츠가 다 떨어진 다음 폴리사리오들은 우리의 베와 같은 옷감을 주었고 우리가 손수 실과 바늘로 팬츠를 만들어 입었다.
선원들 중에는 담배종이나 통조림 깡통의 종이를 뜯어 억류생활의 기록을 위해 일기를 쓰기도 했으나 그나마 종이와 연필을 구하기 힘들어 대부분 도중에 그만 두었고 석방되기 전날 혹시 갖고 나가다 무슨 일이나 있지 않을까 해 다 찢어버렸다.
이발은 마침 동료 선원 중에 이발사가 1명 있어 가끔 깎아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면도칼과 가위를 얻어 서로 머리를 잘라주었다.
날씨 탓인지 환자들이 많이 생겼지만 폴리사리오들은 기껏 아스피린을 나눠주는 정도였다. 머리가 아파도 아스피린, 배가 아파도 아스피린이었다. 웬일인지 파리가 들끓어 피부병 환자가 많았고 지금도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동료선원이 많이 있다.
우리들과 함께 수용됐던 김유수씨(45·갑판원)는 고열과 호흡곤란 등의 증세로 폴리사리오들에 의해 후송됐으나 그 동안 전혀 그의 소식을 듣지 못 하다가 석방전날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모두가 애석해 했다.
돌이켜보면 더위와 파리 떼, 낙심과 실망의 1년이었다.
모두가 영양부족으로 체력이 달리고 폭서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은 강한 정신력 덕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신다바드호의 조재환 선장과 캠추비호의 서규석 선장을 중심으로 모두가 합심해 서로들 위로하고 협조해 반드시 살아서 고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도록 버티었다.
이 같은 선원들의 정신력이 없었다면 지금 살아 남은 사람은 몇 몇 없었을 것이다.
억류 1년 동안 한 두 차례씩 집에서부터의 편지를 받았는데 모두가 발송한지 6개월쯤 뒤에 배달된 것이었다.
폴리사리오들은 우리들의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고 곧 석방될 것이니 기다리라고만 했지만 우리는 한번 속은 경험이 있어 믿지를 않았다.
작년 8월 피납 당시 폴리사리오들은 우리들을 호텔과 같이 시설이 좋은 곳에서 살게 해주고 코카콜라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사막 위의 전막과 땅굴, 모래가 섞이고 벌레투성이인 질 나쁜 쌀과 돌소금이었다.
우리가 외부소식을 접할 수 있는 것은 1대의 라디오였는데 이것은 원양기지의 회사에서 보내준 것으로 뉴스시간만 되면 선원들은 모두 라디오 앞에 모여 귀를 기울였다.
KBS의 국제방송이 그곳까지 들려 늘 이 방송을 들었는데 대부분이 아프리카에 대한 뉴스들이었고 본국에 관한 뉴스가 없어 모든 것이 궁금 투성이였다.
간혹 폴리사리오 감시원에게 우리들이 언제쯤 석방될 것인가에 대해 물었지만 항상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우리 억류 선원들은 작업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만 모로코의 전쟁포로들은 강제노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하면서 우리를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폴리사리오의 정치선전이나 신문을 하는 일이 없어 그런 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억류 중 술은 물론 식사 이외의 다른 것은 먹어 보지 못 했지만 담배는 적으나마 배급받았다.
담배 곽이 그냥 하얀 백지로 된 담배로 나중에 들은 얘기론 알제리제였다. 풀리사리오들은 우리들 어부 한 사람 앞에 이틀에 한 갑씩 배급했지만 우리가 적다고 항의하자 하루에 한 갑씩으로 늘려주기도 했다. 억류를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에게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제인가는 반드시 송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우리가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석방 2, 3개월 전부터 5, 6차례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대표들이 우리를 위문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악수를 나눌 때의 표정은 당신들은 꼭 돌아갈 것이라는 그런 다짐을 주는 것 같았다.
폴리사리오들이 한국선원들에게 작업을 강요하거나 기상이나 취침시간을 규정하지 않아 선원들은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날 수 있어 아침 늦게까지 자는 사람이 있거나 밤늦게까지 자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새벽1시에는 폴리사리오들이 전등불을 꺼버려 할 수없이 잠자리에 들게 마련이었다. 전등불은 폴리사리오들이 발전기를 돌려 사용했다.
선원들과 폴리사리오 간에 부식 문제로 드물게 언쟁이 있었지만 다른 마찰은 없었고 선원들 간에도 해상에서의 규율이 그대로 엄격히 지켜져 절도 있는 생활을 해 우리들끼리 싸움이나 말다툼은 한번도 없었다.
폴리사리오들의 아랍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스페인 말이 약간 씩은 통해 짧은 스페인어와 몸짓으로 의사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스페인의 라스팔마스 원양기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선원들이 많아 스페어를 조금씩은 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는 일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자니 모두들 닭장에 갇힌 병든 병아리 형세였지만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은 지난달 13일 폴리사리오의 한 감시원이 귀띔해 줘 알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지난13일 KBS의 국제방송을 통해 다시 확인했다. 그날 밤은 모두 기뻐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은 선원 모두에게 용기를 주어 지금까지의 고난의 1년을 말끔히 잊도록 해주었다.
우리가 송환되던 날 아침 일찍 해뜨기 전에 국제적십자위원회 대표가 우리를 인수했지만 우리가 악몽의 사막을 떠난 것은 그날 밤이었다.
국제적십자대표는 우리를 인수하자마자 각 개인과 인터뷰를 했고 건강진단·여행증명발급 등의 조치를 취했다.
국적이 북아프리카 대표인 「피터·큉」박사는 무척 예민하면서도 외교솜씨가 좋은 것 같았다. 석방 전에도 여러 차례나 뜨거운 사막을 차를 몰아 우리를 보러왔던 국적대표들에 대한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귀국 후 가족을 만나본 뒤 다시 바다로 갈 것이다. 바다는 우리들의 생업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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