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는 북한측 태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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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3년간 시간갖고 단계적으로 교류 북서 정치선전만 안하면 실현가능|호칭·국기·국가외에도 선수선발등 해결해야>
남북의 스포츠교류에 관한 한국측의 정책은 확고하게 일관되어왔다.
민족의 화합과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단계적 조치로서 정치적 색채가 전혀 없는 체육등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쌍방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협의, 교환경기를 벌이자는 것이다.
전두환대통령이 6·5제의에서『…우선체육·문화…교류부터 시작해서 차차 완전교류·완전개방으로 접근해 갈수있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한것이 바로 이러한 대원칙의 재천명이었다.
이것은 북한이 79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2개월,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불과 6개월 앞두고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급작스레 제의한 것과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있다.
따라서 82년 아시아 경기대회와 84년 로스앤젝레스올림픽및 앞으르 있을 각종 국제대회를 위해 민족 단일팀 구성을하고 그 단계적 조치로 점진적인 체육교류를 실현시키자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포츠교류는 쌍방의 성의와 의사에 의해 쉽게 이루어질수도 있지만 단일팀 구성에는 많은 난제가 걸려있다.
우선 호칭 국기 국가외에 선수단의 선발및 훈련장소등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많다.
남북한 단일팀 구성문제는 이번에 처음 제의된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여러차례 있었으나 선수단구성의 본질적 문제외에 호칭 국가 국기문제등 정치적 기본사항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며 특히 정치적 선전을 일삼는 북한측의 일방통행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남북한의 단일팀 구성문제는 지난57년에 타의에 의해 처음 거론되었다.
63년1월 스위스 로잔에서 IOC의 중재에 의해 남북한은 분단후 처음 단일팀 구성문제를 놓고 직접 대화하게 됐다. 양측은 이회담에서 국가는 아리랑으로 하며 임윈·선수선발은 동서독 단일팀 구성개념에 따른다고 합의했으나 국기및 호칭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어 5월과 7월 두차례 홍콩회담을 가졌으나 북한측이 1차회담후 귀국하여 허위보도및 한국비방을 함으로써 한국측이 이에대해 공개사과를 요구하자 더 이상의 진전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79년2월20일 제35회 평양세계탁구 선수권대회를 불과 2개월 앞두고 북한은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해 판문점회담을 제의해왔다. 양측은 4차례의 판문점회담을 벌였으나 애초부터 한국의 인북을 거부하기 위해 명분을 찾으려는 북한측의 저의가 뻔해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한국은 이동안 73년8월1일 아시아지역 배구지도자 강습에 북한측 지도자초청, 78년 9월9일 서울 세계사격선수권대회에 북한선수단을 초청, 그리고 79년3월12일 남북한탁구친선경기등 부분적 체육교류를 갖자고 북한측에 제의해 왔었다.
한편 우리와 같은 분단국인 동서독은 이미 56년 멜번, 60년 로마, 그리고 64년 동경올림픽등 세차례 단일팀을 구성했었다.
동서독은 단일팀 구성을 성공시키기까지 2백회의 회담과 선수선발등에 무려5백만달러(약35억원)의 경비가 소요되었다.
멕시코올림픽이후 동서독의 단일팀구성이 깨진 것은 이러한 유형 무형의 막대한 노력이 필요한데다 동독측이 정치적 선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민족단일팀구성은 해방전 축구의 경평전과같은 일부 종목의 교류가 선행되면 한층 쉽게 결실을 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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