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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천여년 야생해온 녹차의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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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바구니를 앞섶에 쥔 아낙네들이 둘, 셋씩 짝을 지어 야산을 훑는다.
선향선미, 차 잎을 채취하는 것이다. 바위 사이사이에 비집고 야생하는 차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다.
따 모은 잎이 봄별에 상할세라 아낙네들의 손길이 점점 빨라진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부근 화개곡의 초여름은 이렇게 차 잎 따기로 시작된다.
이곳은 우리나라 차나무의 시배지.
우리나라에 차를 처음 들여 온 사람은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 지금부터 l천1백50여년 전의 일.
『삼국사기』에는『입당회사대렴지차종자래왕사식지리산…』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정다산은『지리산 화개동에 나생되고 있는 차』가 근원임을 밝혀놓았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이 차나무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불과 4∼5년쯤 전이다. 차는 주로 승방에서 명맥이 유지돼 왔으나 이조시대에는 억불정책에다 다에 대한 별도의 세금까지 부과하는 바람에 마구 베어내어 버린 것.
신라 경덕왕이 향가(안민가·찬기파랑가)의 작자인 충담사와 궁중에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타난 최초의 차 마신 역사지만 점점 차나무는 땔감 정도로 쓸모없이 버려져 왔다는 것.
『잎을 따 솔에다 푹 달여 감기가 들거나 밥 먹고 소화가 안돼 속이 더부룩할 때 마시곤 했지요』
이곳에서 태어나 결혼한 김복덕씨(44·여)는「약나무」잎은 가정 상비약으로 주민들이 만병통치로 알고 있었지만 워낙 야생하는 것이 많아 귀한 줄은 몰랐다는 것.
이 마을이 차나무에 눈을 뜬것은 62년 조태연씨(62·화개면 용강리)가 이곳으로 이사오면서부터다.
조씨는 부산에서 식당을 하다 부인 김복순씨(66)와 59년 부산 동래에 있던 식물학자 우장춘 박사의 실습농장에서 차 잎을 한 줌 따다 맛을 본 후「차에 미친 사람」이 됐다.
특히 부인 김씨는 경남 의령의 부자집 외동딸로 출가 전 친정아버지가 정성을 들여 차 잎을 손으로 비벼 만드는 것을 보고 기술을 익혀 놓았던 터였다.
차에 넋이 빠진 조씨는 차나무를 찾아 나선 지 3년만에 이곳을 알아내고 전 가족과 함께 이사 정착했다.
조씨는 이때부터 독자적인 차 제조법을 개발, 주민들 사이에는「차 박사」로 통한다.
『일반적으로 녹차라지만 즐기는 사람끼리 조금씩 만들다 보니 이름도 여러 가지지요. 참새 혓바닥 만한 잎을 따서 만든다고 작설차라고도 하고 대나무 이슬을 맞은 것이 상품이라고 죽로차라고도 합니다.
의제 허백련 화백은 봄눈 맞은 앞을 딴다고 춘설차라고 했지만 모두 같은 것이지요』
「차 박사」조씨가 손수 만든 차를 들고 쌍계사 등산객들에게 한잔씩 무료로 제공해주기 4∼5년만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녹차를 찾는 사람이 늘고 주민들도 차나무가『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차는 사철나무로 4월초 새잎이 보이기 시작해서 20일쯤 지나면「작설」만큼 자란다. 그래서 이 마을의 가장 바쁠 때가 곡우를 전후한 일주일간.
이 마을에 특히 차나무가 잘 자라는 과학적 근거는 없으나 주민들은 연중 따뜻한 기후와 섬진강 상류계곡을 끼고있어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짙게 깔리는 때문으로 보고 있다.
주민들의 40%쯤이 몇 십 그루씩의 차나무를 갖고 있으며 옛 절터가 있는 박석문씨(53) 소유 야산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잎 따기가 시작되면 동네 부녀자는 모두 산으로 모이고 동네가 텅빌 정도.
한사람이 하루 l근도 채 못 따지만 세끼를 먹고 2천5백원씩 받는다.
거의 공짜였던 생 잎 값도 요즈음은 ㎏당 5천원씩 산 주인에게 지불하고있다.
대산 주인 박씨는 잎을 따가게 해주고 올 봄에 4백여만원의 소득을 올렸을 정도.
이 동네에서 생산되는 생 잎은 1년에 10t쯤. 볶아서 만드는 과정에서 5분의1로 줄어, 시중에 팔 수 있는 양은 2t정도다.
완제품은 1백g짜리가 8천∼2만원. 값의 차이가 큰 것은 잎을 따는 시기, 즉 잎의 크기가 어느 정도 때 따 낸 것인가에 따라 맛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한국 다인협(회장 이덕봉·83)에서는 매년 5월25일을 차의 날로 제정키로 하고 이 마을 앞 쌍계사 입구에 김대렴공 차시배추원비를 건립했다.
마을 입구엔 화개제다(대표 홍소구·52)라는 본격적인 생산공장도 생겼다. 차츰 수요가 늘어 작년부터는 제대로 공급을 못하고 있는 실정.
녹차가 세상에 알려질수록 주민들의 인심이 메말라간다고 노인들은 걱정이 태산같다.
『참 인심 좋은 마을이었지요. 요샌 차나무 근처에도 못 가게 합니다. 더구나 딴 동네 사람끼리 제조허가를 둘러싸고 송사까지 벌이고 있으니 돈이 뭔지…』
70이 넘은 노인이 9번 비비고 볶아 손으로 만들었다는 차를 정성을 쏟아 따라준다.
연록색 차에서 풍기는 향내가 짙게 다가온다. 한 모금에 시고 쓴듯한 맛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노인은 차가 냄새와 습기를 모두 빨아들인다며 한지에 꼭꼭 봉한 채 선반 위에 얹은 후 끝없는 녹차 예찬론을 펼쳤다. <하동=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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