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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6)제73화 증권시장(44)증시의 정당화 작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자금 주를 둘러싼 책동 전은 60년대의 증권파동에 이어 70년대에 들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아 될 일대 혼란이었다.
이 사건을 개기로 증권시장의 기능과 제도에 대한 당국의 인식은 한층 높아졌다.
비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는 말과 같이 저시는 이를 개기로 정상화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 전개됐다.
단자도 값진 교훈을 얻은 셈이다.
증시 정상화를 위한 당국의 노력은 자금주책동전이 불을 뿜던71년6월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당시의 혼란사태를 조속히 해결하고 다시는 재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이른바 6·3조치를 발표할 것이다.
그 내용은 첫째 3일로 되어있는 수도 결제 일을 5일로 하고 5일째 되는 날에는 정물로 결제한다.
둘째 대차금융은 결제금융으로 전환하고 투기요소가 강한 자금결제는 이를 폐지한다.
세째 동일인이 동시에 사고 팔고 하는 자전거래를 불허함으로써 무기한 이연을 금지시킨다는 것 등이었다.
이 조치가 즉각 시행 될 경우 당장 시장열기가 냉각하여 위축될 것을 염려한 증권업자들은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일부에서는 법원에다 효력정지 가처분신청과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시장에서는 입회가 정지되고 연일 업자회의가 열리는 등 심한 반발을 받게 됐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한동안 거래는 공정했다. 그러던 중 집행정지가처분신청이 법원에 받아들여짐으로써 6·3조치의 법적 효력이 모호하게 되어버렸다.
거래제도는 다시 환원됐다. 따라서 자금주 책동전은 다시 불꽃을 튀기게 된 것이다.
이때 남하우 재무부장관(현 국무총리)은 이동치 증보국장에게 증권거래법시행령과 관계규칙을 개정하여6·3조치를 관철토록 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국의 생각과 같이 증시 정상화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리게 됐다.
자금 주 사태에 시달려서 허탈상태가 되어 쉬고 있는데 어느 날 강원대 현부사장과 이득용 상무가 찾아왔다.
『사장님, 용기를 내주십시오. 사장님 뒤에는 삼보의 주식 패과 함께 많은 고객이 있습니다. 사장님이 다시 일어서신다면 삼보는 우리 나라 제일 가는, 국제자본시장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증권회사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주위사람들의 이러한 말이 한없이 고마왔다.
그러나 필자가 다시 박차고 일어선 것은 남 재무장관의 증권시장에 대한 관심도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자금 주책동전에서 필자는 승리를 하고서도 패배했다고 할까, 당한 입장이었다.
내가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증권시장의 육성을 위해서는 장해요인은 모두 발본되어야한다는 증권정책최고당국자의 절단의 효시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때의 필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남 장관의 경제정책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금리를 하향 조정했다.
그때까지 증권시장이 잘 되지 못한 것은 우수한 기업이 많지 않은 대다 체질이 취약했으며 시장관리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 요인은 장기형 부총리 시절부터 내려오던 고금리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 장관의 증권정책방향은 이미 실정돼 있었고 추진돼 나갔다.
증권보험 국이 신설되고 홍인기씨가 그 자리에 앉았다.
필자는 재기를 위해 일어섰다.
「증권시장은 반드시 육성되고 자본시장역할을 훌륭히 해낼 날도 멀지 않다」고 확신하며...
나는 가족과 임직원, 그리고 고객들의 격려를 받으며 회사로 출근했다.
평소 비좁았던 사무실인데다 새 출발하는 각오로 사무실을 유네스코건물 3충으로 옮겼다.1백50평 규모로 제법 넓었다. 사무실을 옮긴 후 회사기구도 확대 개편키로 했다.
첫째 조사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사부가 있는 증권회사가 없었고, 또 그 필요성조차 의문시되던 때있다. 조사부가 중심이 되어 보든 자료가 나옴으로써 자기매매도 하고 투자권유도 하는 외국증권회사를 알고있는 필자로서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나는 또 우리 나라 증권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신입사원을 공개 채용했다. 그리고 사원 수를 대폭 올렸다.
이렇게 사옥·기구·조직 등에 대한 대혁신은 나름대로 장래 신념과 전망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 전망이란, 첫째 증권시장을 키우겠다는 당국의 의지표명과 저금리정책에의 전환으로 우리 나라도 선진국형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
둘째 두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우리나라기업도 그 수나 규모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이제부터는 소득과 분배라는 관점에서 기업공개가 늘어날 것이며 상장회사도 늘게되어 발행·유통 양 시장이 모두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는 것. 세째 6·3조치에서 나타난 것처럼 앞으로 거래제도나 시장관리는 선진국의 훌륭한 제도가 도입되게 될 것이므로 6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파동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끝으로 서비스업인 증권업이 서비스위주의 경영과 공신력제고를 위해서도 사옥의 확장은 필요했다. 또 고객들이 갖고 있는「교기」개념을「교자」개념으로 바꾸게 하는데도 한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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