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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3)|제73화 증권시장|강성진<제자=필자>공영제로 바뀐 거래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3년4월27일 증권거래법의 개정으로 거래소는 주식회사제에서 공영제로 바뀌었다.
주식회사제도 아래에서는 특정대주주의 횡포로 거래소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73일간의 장기휴장 끝에 문을 연 거래소엔 고객이 몰려들지 않았다. 이렇게 증시가 장기침체로 빠져들면서 주가가 폭락하자 투자자들의 아우성은 더욱 드높아갔다.
당시의 역대 증권거래소 이사장치고 재임1년을 채운 사람이 없다. 모두가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연속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파동 속에서 이사장 자리가 온전할 리가 없었다. 시장관리가 그만큼 어려웠고 고객들의 입김 또한 드세었다.
당시의 이사장치고 고객의 시달림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툭하면 이사장실로 물려가 큰소리치고 기물을 부수기 일쑤였다.
거래소를 나가면 협회로 가서 또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등 그야말로 고객은 왕이었다. 이 지역은 이 때 거의 무법천지였다.
63년 소위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 때였다. 교통이 일부 마비되고 철시하는 소동까지 있었다.
이 당시 거래소 경영은 아주 어려웠다.
직원들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보유하고 있던 여타주식과 함께 자기주인 한증주룰 팔기로 했다. 부국증권과 한흥증권 두 회사를 통해 매각했다.
소란이 벌어졌다. 그러잖아도 떨어지고 있던 주가가 학생데모사태로 계속 가라앉고 있는 판국인대 투자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순식간에 수백명이 거래소로 몰려들었다. 거래는 중단되고 시장은 이들에게 완전히 점거됐다.
대표자적인 몇 사람은 당시 박승준 이사장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외국의 경우 사회혼란이 일어나면 시장 문을 닫고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례인데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해야할 기관이 혼란을 틈타 보유주를 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성과 함께 이사장실의 기물을 내팽개치며 행패를 부렸다.
시장에는 증권업자·고객·구경꾼들로 꽉 들이찼다.
이들은 회의에서 두 가지 요구사항을 결의했다.
첫째 박 이사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 둘째 그날 거래소가 매도한 한증주룰 다시 반대매매를 통해 환수할 것 등이었다.
휴지 했던 증권시장은 그 날 밤 다시 문을 열었다.
「야시장」에서의 반대매매로 거래소는 한증주를 다시 환수했다.
박 이사장은 며칠후인 3월28일 사표를 던졌다.
그뒤 4월17일 제19대 이사장으로 홍순봉씨가 취임했다.
거래소의 공영제 운영에 관한 정부방침이 불투명하고, 사직당국에 의한 증권파동의 진상규명, 학생데모로 인한 사회불안 등이 겹쳐 증시는 계속 침체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64년7일부터 세칭 해동화재파동이 발생하여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해동화재파동의 시초는 윤응상씨의 롤백 작전이라는 「3일 천하 대 작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동을 몰고 다니는 「증권계의 풍운아」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것이다.
5월 증권파동 관계자로 조사를 받던 윤씨는 63년7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법적으로 중권파동의 관련혐의에서 벗어난 셈이다.
잠시 쉬고 난 그는 62년5월, 10월 증권파동 때 거래소에 증거금으로 납부했던 증금주와 한 저주를 숲 산에 있는 부동산 (박모씨 소유의 군용지로 대지10만평) 과 대체해 달라고 거래소에 요청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거래소 임원간에도 의견이 엇갈렸다. 만일 담보대체를 해 줄 경우 돌려 받은 주식으로,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반대이유였다.
이때 박승준 이사장을 비롯한 거래소의 모든 임원들 (이모이사 한명은 찬성)이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가 계속 대체를 안해 주자 불량배들을 동원, 거래소 임원실을 점령하는 등 소란을 피웠으며 끝내는 일부 거래소 임원들을 사임으로까지 몰고 갔다.
이러한 가운데 윤씨계는 매수작전을 통해 주가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주력회사는 남양증권과 윤씨의 사위가 경영하던 삼신증권이었다.
주가는 뛰기 시작했다. 3월 중순에는 저금주가 3일 동안에 무려 20%씩의 상종가로 치솟는 폭등세를 보였다.
당시는 지금 같은 고정 가격제 (30원, 50원 등)의 가격제한 폭이 아니고 전일종가를 기준으로 20%의 상하종가 제한 폭이 적용됐다.
폭등세를 보였던 주가도 공보도의 명수인 대양증권 김동만 사장이 가담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매수측인 삼신과 남양사이에 도중에 알력이 생긴 탓도 있었지만 대양증권 김동만씨의 투매에 걸려 주가는 또 다시 폭락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당시 증권바닥에선 윤씨의「3일 천하」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이 싸움에서 매수측이 패함에 마라 김씨는 전리품으로 윤씨가 매수한 해동화재 주의 건옥 92만5천주를 넘겨받았다.
이것이 공보도의 명수였던 김씨를 하루아침에 매수측으로 자리를 바꿔 앉게 한 계기가 됐다.
결국 「3일 천하」라는 요란한 뒷소문만 남기고 끝나버린 윤씨의 롤백 작전의 후유증이 바로 해동화재 파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계속>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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