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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그림에 몰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손상기씨<서양화가·장애자>
50년대 말이니까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늑목놀이를 하다가 떨어져 「척추만곡」이라는 불구가 되었다. 그 때 보았던 부모님의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가슴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생의 굴레가 되었다.
치료를 위해 많이 노력했지만 가산만 없애는 결과 의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때부터 놀림을 참지 못해 불량아 아닌 불량아로 변했고, 끌어안고 우시던 어머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말을 잃어버리고, 웃음을 잃어버린 그 때 나는 눌 무엇에 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훨씬 빨리 사춘기를 맞아 죽음에 관하여 생각했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런 중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은 나의 가장 좋은 위안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알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 집안은 극도로 빈곤해 있었고 그 빈곤은 또 다시 어둠을 주었다. 그런대로 여수 제일 중. 상업고등학교를 특기장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어 가정사정과는 달리 학업에는 지장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 각 미술대학 실기대회에서 성적이 좋아 스스로 어떤 가능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단지 신체적 조건 때문이었다. 여기서 또 한번 배움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이 사회에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느꼈다. 그런 나를 보고 집안에서도 진학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도장이나 라디오 기술을 배워 앉아서 생활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 죽음을 부르는 것 같은 절망의 소리였다.
어떤 결심이 서자 무작정 집을 나와 도착한 곳이 이리였다. 거기엔 아담하고 숲이 우거진 대학이 있었다. 원광대학이었다. 이듬해 2윌 응시했는데 입학사정회의 등 어려움 속에도 성적이 좋아 허락되었다. 뜻하는 바를 끌까지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그 때 배웠다.
실내에 합판으로 방을 만들어 기거하며, 밤10시까지 지도하고 새벽이 되는 줄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 학우들은 나를 일명 독충이라 불렀다.
4학년이 되었을 때는 전북 도전 특선 2회와 서울 구상전 동상· 은상을 수상했고, 대학미전 동상 등의 약력을 가질 수 있었다. 졸업하면 서울로 가리라. 더 많이 보고, 느끼고, 공부하리라는 희망이었다.
이즈음 부푸는 가슴이 될 수 있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애정의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시작과 더불어 반대의 화살은 나를 전주를 떠나게 하고 말았으나 13번씩이나 붙잡히는 상황 속에도 우린 결혼을 했고 첫 딸을 낳았다. 서울에 7평 짜리 화실을 준비하여 아내와 딸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꾀 힘든 생활이었지만 용기백배였다.
1년쯤 지났을 때 어려운 생활을 못 이기고, 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그녀는 딸을 두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지난 1월에 비용을 빌어서 발표전을 갖기로 결심했다. 3월 하순 아버님·스승님을 비롯하여 나의 사랑하는 벗들이 축하하는 자리에서 첫 개인전 개막 테이프를 끊었고, 나흘씩이나 일정을 연장할 경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기쁨 속에 나는 크게 울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께 나의 신조를 전하고 싶다. 타인의 도움을 의식하지 말고, 육신처럼 정신을 아프게 하지 말며, 때때로 스스로를 격려해가며, 건강한 사람보다 한시간이라도 더 생각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고. 불구아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에게는 형제간에 차별을 두지 말며, 지나치게 보살피는 것을 피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야할 것임을 부탁하고 싶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강한 자녀보다 더 많이 공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부나 사회단체 등에서는 유행적으로 끝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항상 있어야 할 것이며 휠체어나 목발로도 혼자 다닐 수 있는 도로시설의 중요함을 알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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