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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철 따라 피는 꽃은 천혜의 밀원|곡성군 죽곡면 「하한 한봉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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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얼어붙었던 대지가 따스한 봄기운에 기지개를 켤 무렵이면 긴 겨울잠을 자던 벌들도 접었던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벌들의 새해는 3월 중순. 수천 마리씩 떼를 진 벌들은 양지바른 꽃을 찾아 겨우내 잊었던 집터를 익히기에 바쁘고 성미 급한 놈들은 벌써부터 꽃을 찾아 탐색여행을 떠난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하한2구. 30가구 1백83명의 주민들이 대대로 벌을 치며 벌처럼 부지런히 살고있다.
이 마을이 호남 제1의 토종꿀을 생산하게 된 데는 마을주변의 자연환경이 다른 지역보다 벌들의 사역(사역)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안은 봉두산(해발7백m)과 매봉산(해발5백m)은 철 따라 꽃이 끊이지 않는 천혜의 밀원. 3, 4월 봄에는 진달래·개나리·장다리꽃이 골마다 등성이마다 지천으로 피어나고 5, 6월 초여름에 접어들면 아카시아·밤·감·배·복숭아꽃이 뒤를 이어 벌을 유혹한다. 벌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7, 8월에는 양봉에서도 탐을 내는 싸리 꽃이 온산을 자주 빛으로 물들인다.
『어쭙잖은 꿀 행상도 흥정할 땐 「하한토종꿀」을 들먹일 만큼 전국에서 이름나 있지요.』
7대째 이 마을에서 꿀을 쳐오는 김재호씨(54)는 옛날 같으면 일반서민들은 손도 대보지 못하고 전량이 궁궐과 중앙대가 집에 납품되었다고 한다.
들국화도 지고 첫 눈이 내리는 11월말이면 주민들은 1년 중 가장 즐거운 한철을 맞는다. 1년에 단 한번 밖에 없는 꿀 뜨는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새소리·물소리와 「웅웅」대는 꿀벌들의 비상하는 자연의 소리 외엔 조용하기만 한 산골마을에 갑자기 사람이 몰리는 것도 이때다.
전국각지에서 찾아드는 중간 채집상들에다 진짜 꿀을 사려고 소개장을 들고 이곳까지 걸음수고를 하는 서울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이맘때면 마을에 들어오는 우편물도 부쩍 늘어 꿀을 주문하거나 문의해오는 편지가 한달 새 3백여 통.
마을공동 전화취급소를 이용해서 꿀을 주문하거나 다 팔릴 것을 염려해 예약해놓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전화가 하루에도 10통화 이상씩 걸려와 마을에서는 작년에 「앰프」시설을 해서 전화가 걸려온 사람을 부르게 만들어 놓고 있다.
이 마을에서 1년에 생산하는 꿀은 평균 1천근(6백㎏). 여름장마가 길지 않고 날씨좋은 날이 많을수록 생산량은 늘어나 최고 1천3백근까지 수확하는 해도 있다. 값은 1근에 1만2천∼1만5천원.
집집마다 평균 7∼8개 군(1군은 가로·세로·높이 20㎝크기의 정사각형 벌통 5∼6개를 포개놓은 규모)의 벌통에서 55만∼8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한 봉은 1년 동안 철 따라 피는 꽃이 모두 한데 모여 벌통에 꿀로 저장되는 반면 양봉은 아카시아·찔레꽃 등 꽃 종류에 따라 꿀을 따는 만큼 약효나 맛에 있어 한 봉이 월등할 것은 자명한 일. 주로 강장·강정을 돕고, 혈액순환을 촉진,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꿀의 일반적인 효용이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한봉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주 오래 전」마을주변의 고목에서 천연벌집을 발견하면서부터일 것이라고 주민들은 추측하고있다.
서울 등 소비지에선 하도 가짜 꿀이 많이 나돌아 아예 설탕을 마시는 셈치고 꿀을 사는 게 속이 편하다고 하자 20년째 한봉을 치는 김재석씨(42)는 『꿀에 관한 한 부자지간에도 속인다』는 옛말이 있다며 『그만큼 진짜 가짜 구별하기가 힘들고 가짜를 만들면 엄청난 이윤이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씨는 가짜를 만들어본 일이 없어 솔직히 진짜와 구별하는 법을 모른다고 한다.
『우리 하한꿀은 말여 색이 곶감 풀어놓은 갈색이제. 물 안타고 맹으로 한 숟갈 먹으면 셋바닥이 불붙고 숨이 차는 게 현기증이 팽팽나게 독하당께.』
유월등 할머니(90)는 조청으로 만든 가짜 꿀을 하한 꿀이라 속이는 사람은 벼락맞을 장사꾼이라며 펄펄 뛴다.
꿀벌마을의 주민들은 벌만큼이나 부지런하다.
계곡주변과 완만한 경사지에 일궈놓은 논밭이 8만여평. 쌀·콩·고구마를 주로 재배한다.
『산간이라 돈 쓸 곳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예금을 많이 하지요. 모르긴 하지만 1백만원 짜리 통장이 있는 집도 10여 가구는 될 겁니다.』마을 이장 김씨의 말이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산골에서 꿀벌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마을주민들 사이엔 무병장수(무병장수)하는 노익장들이 많은 게 자랑이다.
현재 최고령은 92세의 김학규씨 부부. 이밖에 80세 이상이 8명, 70이상 노인이 13명이나 된다.
토종벌의 천적은 양봉벌.
몸집이 두 배나 되고 성질이 포악한데다 욕심이 많은 양봉벌은 언제나 토종벌집을 습격, 벌전쟁을 일으키는 말썽꾼이다.
한봉은 한번 집을 지으면 1년을 옮기지 않지만 양봉은 꽃을 찾아 벌집을 옮기기 때문에 늘 벌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장 김씨는 가짜 꿀을 만드는 상혼도 못됐지만 한봉치는 근처에 양봉벌통을 갖다놓는 심술궂은 양봉업자들도 반성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늘 당하면서도 토종벌을 닮았는지 우리동네 사람들은 마음이 순해서….』 그래도 아직 다툼한번 없이 최상품 꿀을 받는 복마을이라고 김씨는 소탈하게 웃는다. 【곡성=정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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