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가스」가 앗아간 「인술의 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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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명 강의에 짠학점, 동양화가, 거석수집가, 외곬의학박사의 「닉·네임」이 붙어 다녔던 신경외과 학의 세계적 권위 백재 이헌재 교수(60·연세대의대신경외과과장) 부부가 연탄「가스」에 쓰러져 13일 유명을 달리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녹번동 자택에는 흐느끼듯 내리는 봄비가 밤을 적시는 가운데 동료교수, 친지, 제자 등 평소 이교수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던 문상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올해 제자들이 차려드리기로 한 환갑잔치도 마다하시고 정년퇴임 때까지 5년간 우리 나라에는 아직 없는 신경과학연구소설립에 몸바치고 강단을 떠나겠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경북 고령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신경외과학계의 세계적 권위가 되기까지 이 교수의 외길 인술은 「세브란스」의전(44년)을 졸업하면서부터 학문과 일만 아는 고집스런 일생이었다.
6·25때는 군의관(소령)으로 일선에서 미군의관을 통해 신경외과의 중요성을 절감, 휴전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경외과전문의(「미시간」대학)로 수련을 쌓았다. 귀국 후 59년부터 수도의대(현 고려대의대)·연세대의대 등을 거치며 「명 강의에 짠 학점」의 괴짜교수로 의학도들의 인기를 끌었다.
우리 나라 의료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세계저명인사록인 「후즈후」(Who's Who in the World)에 수록(78년)되기도 했던 이 교수는 인술이외에도 범상의 도를 넘는 동양화가로, 그리고 국내에선 단 한사람뿐인 거석수집가로서도 유명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의 문하에서 묵도를 다듬고 특히 복숭아를 즐겨 그린 이 교수의 화풍은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있었고 평소에도 늘 정년퇴임 후에는 고향인 영남지방에서 묵화나 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해왔다.
이 교수의 거석 수집의 자취는 66년 이후 15년간 교단에선 연세대「캠퍼스」곳곳에 남아있다.
70년부터 사재를 털어 「크레인」 「덤프·트럭」 등을 동원, 원주·하동 등 전국 방방곳곳에서 4∼5t씩 되는 풍채 좋은 거석 등을 수집했다. 마치 자신의 정원을 꾸미듯 연세대「캠퍼스」에 수집해놓은 거석만도 10여 개가 넘는다.
교수생활 22년 동안 한번도 교내보직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해온 이 교수는 돈 따위는 모르고, 앞만 보고 걸어 옆에 지나치던 교수나 학생이 인사를 해도 못보고 지나치기로도 유명했다.
동양화 유작 몇 점과 연세대「캠퍼스」곳곳의 거석 외에 남긴 재산이라고는 5년 전에야 마련한 현재의 집 한 채 뿐.
그러나 평생을 인술에 몸바쳐온 이 교수는 갔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제자가 아들처럼 있고, 아버지와 장인의 뒤를 이어 역시 인술의 길에 들어선 최중언씨(35·연세대의대신경외과조교수) 등 세 사위와 혜영씨(30·미「미네소타」대 내과수련의) 등 두 딸이 있어 이 교수는 저승에서도 외롭지 않다.
『고인의 숙원이던 신경과학연구소의 설립이 아마 이 교수께서 남기시고 싶었던 유일한 유언이었을 겁니다.』
이 교수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강단에 섰던 이규창 박사(44·연세대신경외과)는 고인의 낙관도 선명한 유작을 바라보며 유명을 달리한 스승의 명복을 빌었다.
이 교수의 장례식은 17일 연세대의과대학장으로 거행된다. <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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