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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상대방 대의 인정하고 내 대의 펼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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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드라마 중 KBS 대하사극 ‘정도전’은 공익성과 화제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유일한 드라마로 꼽힌다. 21일 ‘정도전’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선정한 ‘6월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모든 매체에서 방송되는 모든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4~6개를 선정한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상을 타가지만 대부분 다큐멘터리나 시사ㆍ교양 프로그램이다. 올해 드라마 중 이 상을 받은 건 SBS ‘별에서 온 그대’와 ‘정도전’밖에 없다. 다음달 세계 드라마들이 참가하는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도 국내 드라마 중 작품상ㆍ연출상ㆍ작가상 모두 본심 후보에 오른 작품은 ‘정도전’뿐이다.

정도전은 매회 ‘촌철살인’의 어록을 쏟아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 사극치고는 빠른 전개로 긴장감을 유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인 건 정치와 리더십을 다룬 ‘이야기의 힘’이었다. 진정한 리더십에 목마른 이들이 영화 ‘명량’에 반응했던 것처럼, ‘정도전’의 시청자도 역사 속 인물들의 리더십에 공감했다.

이런 이야기의 힘을 제대로 이끌어 낸 게 정현민(44) 작가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10여 년간 여야를 두루 경험했다. 역사 속 정치 리더십을 살아꿈틀대는 것처럼 시청자에게 보여준 든든한 밑천인 셈이다. 종영을 앞둔 6월 말 그를 만난 자리에서, 그리고 이후 몇 차례 전화 통화로 그에게 정도전과 리더십을 물었다.

-당신이 보는 정도전은.
“정도전의 캐릭터를 잡을 때, 초반에는 혈기왕성하고 패기만만한 성리학 근본주의자로 그렸다. 한마디로 시골 출신으로 서울대 나와서 행정 고시 패스한 인물이다. 세상이 제 것 같고 자기가 다 아는 것 같은 젊은 엘리트다. 단지 그의 마음 속엔 올바름이 있다. 귀양가서 현장을 배우고 자기의 무기력함을 깨닫게 되면서 환상이 깨진다. 혁명을 꿈꾸면서부터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혐오했던 간신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나중엔 이상과 대의에 함몰하는 괴물의 모습도 언뜻 비친다. 하지만 마음만은 순수하니까 보는 사람은 짠하게 와닿지 않았을까. 죽음 앞에서도 자기를 대업의 제단에 던져버린 것처럼 생각하는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
“시대를 앞서간 이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난 작품하기 전에 정도전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내가 역사를 잘 알았더라면 자기 확신이 강해서 편견을 갖고 인물을 그렸을 거다. 그런데 공부할수록 정도전이 신선했다. 마키아벨리보다 이른 시기에 놀라운 발상을 많이 했다. 정치가로서 요즘도 필요로 하는 덕목들, 즉 도덕성ㆍ추진력ㆍ원칙주의를 모두 갖춘 사람이다.”

-만에 하나 그가 살아남았다면 대업을 성공시켰을까.
“성공하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도전의 사상은 정확히 얘기하면 신하가 권력을 갖는 게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함께 통치하는 방식이다. 정도전은 왕실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왕실 행사를 할 때에도 재상에게 결재를 받으라고 해서 이방원과 논쟁도 한다. 600년 전에 그런 주장을 했던 건 놀랍다. 입헌군주제의 맹아적 형태였다. 그의 실패로 근세는 더디게 왔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도 남아서 울림을 준다.”

-어떤 울림인가.
“한마디로 하면 꿈이다. 결국 정도전도 꿈을 꿨기에 시작한 거 아닌가. 처음엔 정도전과 이성계 관계를 쿠바 혁명 영웅인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관계로 생각했다. 민중을 중심에 뒀고 혁명가인 것도 공통적인데 뭔가 다르다. 체 게바라는 무장 투쟁을 추구했지만 정도전은 무혈 혁명을 꿈꿨다. 정도전이 더 위대해 보였다.”

# ‘꿈 꾸라’는 메시지 전하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이 없다고들 한다.
“역사상 가장 풍요롭지만 꿈의 크기가 우리 시대 사람들보다 작다. 개천에서 용이 안 나오고, 취업이 안 되니까 꿈이 사치인 거다. 정도전만한 인물이면 더 큰 꿈을 꾸고 아니면 작더라도 다른 꿈을 꿔야 하는데. 각자가 처한 위치에 맞게 꿈을 꿨으면 좋겠다. 그래서 ‘밥버러지를 면하고 싶으면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꿔보라’는 대사를 넣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도 퇴로가 없다. 그 안으로 가서 싸우는 거다. 벽이 높아도 다리 삼아 건너야 한다’는 대사도 시청자에게 꿈을 꾸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 쓴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이 다스릴 민중을 어떤 이들이라고 생각했나.
“정도전의 세계관이 변화한 순간은 귀양을 갔을 때다.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혁명을 결심했다고 나온다. 고려의 충신이 고려라는 괴물을 무너뜨리는 결심을 하게 된 거다. 역사에선 한 줄 정도로 짧게 나온다. 드라마에선 양지라는 인물을 넣어 이를 설명하려 했다. 정도전이 양지를 통해 백성의 모습을 깨닫는다. ‘양지(良知)’란 이름은 맹자의 개념을 차용했다. 학습받지 않고도 착하게 행위하는 심성의 원형을 의미한다. 정도전이 생각하는 백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고난을 견디면서도 착한 심성을 잃지 않는 모습.”

-지금의 민중도 양지같을까.
“물론 당시도 지금도 영악하고 나쁜 사람이 있다. 드라마 속 천복이는 왜구 길잡이를 한다. 하지만 그 마음 안의 원형질은 어떨까. 사람이 영악해 보이지만 심성 자체가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하면 누가 정치하려고 하겠나. 세상 바꿔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중 근본의 선함을 믿는 사람이다. 혁명하는 사람들은 감성적이다. 혁명은 이론적이거나 독한 사람이 한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순수함을 믿는 사람들이다.”

-지금 세상도 혁명이 필요할까.
“여말선초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돼 있던 시대다. 시청자가 그걸 지금 시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고 보면서 ‘노린 거냐’는 질문을 많이 던지더라. 분명한 건 지금이 그때 같은 난세는 아니다. 혁명이 필요하다고 절대 생각지 않는다. 다만 배워야 할 지점은 있다. 고려말은 권력이 사유화돼서 특정 권문세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고려는 망해야 되는 나라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 양극화는 또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주변에 내몰리는 민생은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를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현대 대중의 답답함을 해소해줄 수 있고, 열광할 수 있는 정치를 보여주길 바라는 염원이 드라마에 투영돼 인기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 요즘 정치인 서로를 적으로 대해…현대 정치물 “자신 없다”

-보좌관은 어떻게 시작했나.
“사람들은 보좌관이라 하면 정치하려는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난 정치하러 간 게 아니라 노동 쪽 일을 하려고 갔다. 10년 동안 여야 의원 5명을 모신 것도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동 부분을 맡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의원이 상임위를 바꾸기도 하고 4년 지나면 낙선도 하니까. 노동 정책 전문가가 인생의 모토였다. 정치적으로는 철새일지 모르지만, 노동만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처음엔 소위 운동권이었고 민노당 당원이었다. 처음엔 민주당도 눈에 안 들어올 정도였다.”

-지금도 그런가.
“들어가서 배운 건 사회 운동과 정치의 차이였다. 사회운동은 특정한 이해 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행위다. 정치는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더라. 제일 놀란 건 이거다. 내가 밖에서 데모할 때는 노동과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국회 들어가서 어떤 정책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동부든 다른 당이든 회사 측이든 의견을 갖고 오는데 대단히 정교하고 단순하지 않더라. 그때 느낀 게 ‘너의 대의만 진리라고 생각지 말라. 대의 반대 쪽엔 또 다른 대의가 있다’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사다.”

-누구나 저 마다의 대의가 있다는 건가.
“나도 국회 들어가기 전에는 모든 사안을 선악의 충돌로 봤다. 노조는 선, 자본가는 악. 데모하는 사람들은 적이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정치는 그게 아니다. 일을 차츰 하면서 세상을 보니 정치라고 하는 건 선악의 프레임으로 덤벼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대의를 인정하고 나의 대의를 펼치는 것이다. 적(enemy)이 아니라 상대방(adversary)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시청자는 ‘나는 민주당을 찍었는데 이인임이 왜 매력적일까’라고 했다. 그런 반응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국회에선 상대방을 적으로 대하지 않나.
“외부에선 그렇게 보이긴 한다. 당직자와 보좌관을 헷갈려해서 일 수도 있고. 보좌관은 당의 소속이 아니라 국회사무처 소속으로 공무원이고 당직자는 당 소속이다. 보좌관은 당을 바꾸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고 흔한 일이었다. 당은 달라도 보좌관은 같은 상임위에서 고민하고 마주 앉아있고 그러기 때문에 동료의식도 있다. 촬영할 때 간식차 보내준 것도 ‘노동마을’인데 구성원이 새누리당도 있고 민노당도 있고 청와대도 있다. 정치적 지향은 다르지만 만나서 안 싸운다. 10년째 계모임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국회에 그런 모임 없더라. 내가 16대 국회 때 들어갔는데, 17대가 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더니, 18대 때 되니까 당이 안 옮겨졌다.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갔는데 못 돌아왔다. 난 한 번도 몸싸움을 안 해 봤다.”

-현대정치물은 할 생각 없나.
“일제시대를 다룬 드라마를 5부작으로 한 적 있다. 일본인이면 나쁜 놈이고 등장인물도 몇 없고 해서 괜찮았다. 그런데 그 드라마도 길게 가면 친일파도 나올 텐데 쉽진 않을 거다. 그래도 그 정도면 할 수 있다고 보는데 현대정치물은 솔직히 말해서 자신없다. ‘정도전’ 쓰면서도 ‘혁명드라마인데 청와대의 외압없었냐’고 물어본 사람들이 있었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5ㆍ16을 미화하려 한다는 사람도 있다. 600년 전 얘기인데도 반응이 양극단으로 나뉜다. 과연 이런 우리나라 환경에서 현대 정치인의 얘기를 쓴다는 게 가능할까. 현대인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므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대중이 끝까지 보고 판단해주는 풍토인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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