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지킨 「카를로스」왕의 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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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페인」이 군부독재의 긴수렁으로 다시 빠져들지 않은 것은 「환·카를로스」왕(43) 한사람의 결단과 지도력 덕분이었다.「카를로스」왕 측근의 한 소식통은 왕이 23일 하오 「쿠데타」에 가담해 달라는 군장성들의 요청을『목숨을 걸고 반대한다』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곧 각급 군사령관들에게 연락, 반란에 가담하지 말도륵 지시함으로써 군의 동요를 막았다고 전했다.
궁정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해 구성한「국왕과 반란음모」의 줄거리는 다음과같다.
사건이 일어나던 23일 하오5시, 의회가 수상지명자「레오폴도·소텔로」의 인준토의를 벌이고 있을 때 육군참모차장 「아마다·코민」장군(61)과 몇 명의 장교들은 국왕에게 긴급알현을 요청했다.
같은 시간에 「마드리드」에서 동남방으로 4백km떨어진 「발렌시아」 군구 사령관「보시」 소장은 관할지역내에 통금령을 내리고 군을 동원, 전략적 요충들을 점거했다.
이때쯤 「마드리드」에선 「몰리나」중령과 부하들이 6대의 민간용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버스」는 두달전 「몰리나」의 부인 「카르멘」의 이름으로 사들였었다.
왕궁에선 「코민」장군일행이 「카를로스」 왕을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귀족인「코민」 장군은 「카를로스」국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의 한사람이었다. 그는「프랑코」의 명에 의해「카를로스」의 군사교육을 맡았었고 그후엔 왕가의 일을 돌보기도 했다. 군에서「카를로스」를 설득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국가를 위해서 자기들의 거사를 지지해 달라고 「코민」은「카를로스」에 간청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딱부러지게 거절했다. 『헌법에 규정된대로 민주정치와 기본자유를 지키기위한 나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카를로스」는 잘라말했다. 장교들은 「스페인」에 만연한 지역파벌주의와「바스크」「테러」활동, 정치적 파쟁이 국가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소식통은 그들이 왕에게 의사당으로가 의회해산과 군정위윈회의 수립을 선포하도록 요구했다고 전했다. 정권을 맡을 군정위원회는 「코민」이나 「보시」장군이 이끌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모든 설득에「카를로스」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앉았다. 「몰리나」 가 의사당에서 초조하게 기다린 것은 바로 「코민」장군과 「카를로스」 의 도착이었다.
「코민」의 간청을 거절한「카를로스」는 곧 전화를 들고 밤10시쯤부터 다음날 새벽1시까지 군의 고위장성들과 계속 통화를 했다.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라는 내용이었다.
「발렌시아」의 「보시」장군도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보시」는 곧 비상조치를 풀고 『공공안보를 위한 조치였다』 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려나 「몰리나」일행은 이미 일을 저지른지 오래였다. 첫시작부터 실패의 운명을 안고있었던 「몰리나」의 거사는 「보시」가 마음을 돌린 순간 사실상 끝장난 것이었다.
전혀 호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우익장교들은 자발적으로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다.
육군의 「멜로·아파라치오」대위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방송국을 점령한 후 군가만을 방송토록 했다.
거사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곧 방송국에서 퇴각했다.
왕이 「텔리비전」에 나타난 것은 24일새벽 1시15분이었다.
충성을 서약한다는 군지도자들의 확약을 받아놓은 그는 자신을 갖고 방송에 임했다.
「몰리나」는 아침까지 기다리면서 「코민」과 거듭 의논했다. 정부측과 「코민」은「몰리나」에게 국외로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으나 결국「몰리나」는 무조건 투항했다.
【마드리드AP=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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