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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쌀 관세화, 농식품 수출로 돌파구 찾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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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나승렬
농협중앙회 산지유통본부장
전 농산물품질관리원장

중국 TV 다큐멘터리인 ‘대국굴기’는 근대 이후 세계 9개 강대국(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미국)의 성공요인을 다뤘다. 대부분 한국보다 영토와 인구 규모가 큰 나라들이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네덜란드다. 이 나라는 면적이 남한의 절반밖에 안 되고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 흐린 날이 많아 일조량도 부족하다. 농업을 하기엔 열악한 자연조건이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미국에 이어 농식품 수출 세계 2위의 농업대국이다. 튤립 등 꽃 수출은 세계 1위, 채소·과일은 세계 3위다. 농업대국 네덜란드를 만든 것은 넓고 기름진 옥토가 아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척하는 네덜란드 농민들이다.

 정부가 고심 끝에 쌀 관세화를 결정했다. 이제 쌀 관세화를 유예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필리핀이 유일하다. 20년 전 쌀 관세화를 유예했을 때에 비해 우리 농업 여건은 많이 바뀌었다. 농업에서 쌀의 비중은 20년 전 28%에서 현재 17%로 크게 낮아졌다. 일각의 주장처럼 쌀 관세화로 수입 쌀이 밀려 들어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먼저 쌀 관세화를 한 일본과 대만도 의무수입물량 외 수입량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쌀전업농중앙회 등 대부분의 농민단체와 농민들도 관세화의 불가피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농업계는 고율 관세 부과 등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의견 수렴을 위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농민단체가 참여한 ‘쌀산업발전협의회’를 출범했다. 쌀 관세화에 반대하는 전농까지 참여한 만큼 쌀산업 대책뿐 아니라 우리 농업 전체의 살길을 논의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이제 우리 농업계는 쌀 관세화를 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농식품 수출을 늘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미 일부 농민과 지역농협들은 농식품 수출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서천농협 등은 쌀 170만 달러어치를 호주 등에 수출했다. 중국과 위생검역협정이 체결되면 더 많은 쌀을 수출할 수 있다. 중국은 쌀 순수입국이기 때문이다. 비싼 고품질 쌀은 수천만 명의 중국 부자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도 도전해 볼 만하다.

우리의 화훼, 과실, 채소와 버섯 등 특용작물도 경쟁력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지난해 100만 달러어치의 장미를 러시아 등에 수출한 농가가 있다. 경남 김해 대동농협은 일본에 1800만 달러어치의 백합·장미 등을 수출했다. 진주의 수곡농협은 올해 딸기 1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할 계획이다. 경북 청도의 영농법인 그린피스는 지난해 미국 등에 버섯 1700만 달러를 수출했다.

 특히 조제분유·김·차 등 가공식품은 수출 전망이 밝다. 전남 고흥의 두원농협은 올해 유자차 수출 목표를 지난해의 약 3배인 800만 달러로 잡고 있다. 김 수출도 2009년 8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억5000만 달러로 3배 이상 늘었다. 경기도 이천의 예맛식품은 2010년 김스낵을 53만 달러어치 수출했는데, 미국·일본 등에 공격적 마케팅을 펼친 결과 지난해는 1400만 달러를 수출하는 경이적인 성과를 거뒀다. 중소 식품회사도 품질만 받쳐 주면 수출로 ‘대박’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매일유업은 중국 등에 조제분유 2500만 달러를 수출했다. 중국은 조제분유 수입 규모가 연 10억 달러를 넘는 큰 시장이다. 2004년 가짜 분유사건과 2008년 멜라닌 분유 파동으로 수입 분유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현재는 유럽 낙농강국들이 중국 조제분유 시장을 제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업계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으며, 한국 유가공업계 1위 서울우유(농협)가 중국 시장에 뛰어들면 조제분유 수출은 훨씬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농산물 수출의 대표 주자는 파프리카다. 일본 시장에서 농업강국 네덜란드를 물리쳤다. 사실 우리 파프리카 농가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이긴 요인은 네덜란드의 앞선 원예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ICT(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 기술을 활용한 네덜란드의 유리온실 복합환경 제어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생산기술이 우수하면 유럽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일본·중국·동남아에선 세계 최고 농업강국 네덜란드도 이길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농업계는 농지 개혁, 새마을운동, 녹색혁명이라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올린 저력이 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세운 2020년 농식품 3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높여 농식품 수출 5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추진해야 한다. 농식품산업은 고용효과가 크고 친환경·고품질화를 꾀하면 부가가치도 높아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첨단 연구개발과 기술교육 ▶협동조합 중심의 강력한 유통 경쟁력과 마케팅 ▶철도·항만·공항 등 효율적인 농산물 물류 인프라 등 네덜란드의 농식품산업 성공요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나승렬 농협중앙회 산지유통본부장·전 농산물품질관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