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의 책편지] '왕따'당하는 사람의 상처 따돌리는 사람은 아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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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나는 골똘히 생각하곤 한다. 어떻게 하면 딸한테 따돌림당하지 않겠는지. 어제 저녁 식사 장면이 떠오른다.

딸이 식탁에 앉자마자 책을 펴들고 얼굴을 가린다. 며칠 전에도 '아아, 난 왜 이렇게 사춘기가 길지?'라는 기묘한 탄식에 이어 '엄마 어디 안 가? 나 혼자 집에 있고 싶은데!' 라는 소망을 토로한 바가 있지만,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다.

아침에는 학교 가느라 허둥지둥,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 방에 들어가 숙제하느라 잠잠, 잠들기 전까지는 헤드폰으로 귀 막고 앉아 컴퓨터만 바라보며 또닥또닥… 서로 얼굴 볼 짬이라곤 저녁식사 때뿐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말이다.

내 표정이 심상찮은 걸 눈치 채고 딸이 변명 겸해 선수를 친다. "중학생이 되니까 너무 시간이 없어. 밥 먹을 때만이라도 책 좀 읽어야지."

설핏 듣기엔 그럴 듯한 얘기 같아서 짐짓 안쓰러운 마음마저 드는 순간, 나는 고개를 흔든다. '그렇게 말할 순 없지. 그대가 날마다 채팅으로 흘려보내는 그 수많은 시간은 어쩌고?'

하지만 그렇게 다그쳤다간 필시 딸한테 따돌림당할 터, 나는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다. "엄마 서평모임에서 빌려온 책이잖아. 더러움 타면 안 되니까 나중에 보자."

최근에 '따돌림'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었다.

세계명작전집에 빠짐없이 들어있는 '독일어 시간'의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가 쓴 '아르네가 남긴 것'(사계절).

파산한 부모가 목숨을 끊는 바람에 아버지 친구 집에서 살게 된 열두 살 소년 아르네, 핀란드 여행 중에 사귄 친구의 모국어로 편지를 쓰기 위해 핀란드 어를 배우는 아르네, 매듭 하나가 바람을 풀고 묶는다고 믿는 아르네, 전교생과 부모님들 앞에서 글짓기 대회에 1등한 원고를 읽다가 쓰러지는 아르네, 먼 훗날 통역사가 되는 공부를 시작하는 아르네, 간신히 끼어든 패거리에게 더 지독하게 따돌림당할 줄 알면서 자기 잘못을 털어놓는 아르네…

뛰어나게 총명하고 예민한 이 아이는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 친구 부부를 '삼촌'과 '숙모'로 부르며, 같은 방을 쓰는 한스 형의 다정하고 믿음직한 보호를 받으며, 슬픔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서서히 치유해 나간다.

하지만 또래인 비프케와 라르스는 자기네 패거리에 들려고 애쓰는 아르네를 쌀쌀맞게 대하다가 이용하고 조롱한 다음 떠민다….

아르네의 순수하고 예민한 영혼이 다시금 얼어붙어 가는 대목에선 누구든 가슴 아픈 부끄러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따돌림'이 끔찍한 이유는, 따돌리는 쪽이 자기가 누굴 따돌린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더욱 따돌림당하는 쪽의 아픔과 상처 같은 건 꿈에도 알 수가 없다.

따돌리고 있다는 걸 인정해도 그 아픔을 짐작하는 것은 1만분의 1 정도랄까. 심지어 따돌림당하는 사람 또한 자기가 종종 누군가를 따돌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아이러니에 이르면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 오늘 아침 해를, 옆자리의 친구를, 사랑하는 어머니를, 누나를, 동생을, 눈부신 벚꽃을, 한번 눈길도 주지 않고 따돌린 적은 없는지 생각해보자.

이상희<시인.그림책 작가>

*** 약력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잘 가라 내 청춘'(민음사) '벼락무늬'(민음사), 그림책 '도솔산 선운사'(한림출판사) '외딴 집의 꿩 손님'(프뢰벨 등 지음), '대포알 심프'(비룡소)'벌레와 물고기와 토끼의 노래'(베틀북) 등 번역. 현재 '아침햇살' 서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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